시선뉴스=양원민 기자 / 디자인=김선희 proㅣ위르겐 클린스만 축구 국가대표팀 전 감독이 근무태만, 경기력 부진, 선수단 관리 부재 등의 이유로 경질되며 U-23 감독 ‘황선홍’이 표류하는 난파선의 임시 선장을 맡았다. 황선홍 감독은 2018년 7월 신태용호 이후 약 6년 만의 한국인 감독인데,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기까지 어떠한 경력을 쌓아왔는지 낱낱이 살펴보자.

황선홍 감독은 건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1992 K리그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독일의 레버쿠젠(아마추어)에 입단했다. 첫 시즌 좋은 활약을 선보이고 이듬해인 1992년 부퍼탈 SV로 이적했지만, 계약만료로 한국에 돌아와 포항제철 아톰즈(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다. 포항 입단 후 1995년 8경기 연속골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포항의 K리그 준우승을 견인했다.

이후 1998년 일본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해 1999년 J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최전성기의 기량을 뽐냈다. 이듬해인 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했으나 부상으로 정규리그에서 뛰지 못하고 J리그 가시와 레이솔에 임대되었다가 정착하게 됐다. 레이솔에서 2001년 8월까지 활약 후 무적 상태로 있다가 10월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지만,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2003년 2월 은퇴를 공식 발표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황선홍은 길지 않았던 현역 시절 전성기에 후반기에는 부상을 달고 살았지만, 1988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일본과의 경기를 치른 이후 4회 연속 월드컵을 치르는 등 은퇴 직전까지도 오랫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활동했다. 

‘황선홍’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했던 2002년에도 히딩크 전 감독의 총애를 받은 핵심 주전 선수였다. 당시 공격수로서 은퇴할 나이인 30대 중반에도 주전 공격수로서 대한민국의 4강 진출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예선 2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는 이마가 찢어졌지만, 부상 투혼으로 붕대를 감고 뛰며 교체될 때까지 몸을 아끼지 않아 국민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황 감독은 2002년 11월 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전을 끝으로 당시 국가대표팀 주장이던 오랜 동료 홍명보와 함께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는 A매치(국가대표팀 간의 경기) 통산 103경기에 출전해 50골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국가대표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러한 성적으로 황선홍은 대한민국 선수 중 세 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센추리 클럽’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공인하는 A매치(국가대표팀 간의 경기)에 100회 이상 출전한 선수들의 명단으로, 국가에서 중요한 핵심 선수로서 오랫동안 국가대표로 인정받아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황선홍은 은퇴 후 2003년 전남 드래곤즈 코치로 부임해 지도자로서 제2의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2007년부터 부산 아이파크 감독직을 3년간 맡았으나 아쉬운 성적으로 마감했다. 하지만 2010년 포항에 부임한 후 첫해 포항을 정규리그 2위로 이끌었으며, 2012년과 2013년 FA컵 우승을 차지해 지도자로서의 성공 신화도 쓰기 시작했다.

이후 FC 서울, 옌볜 푸더, 대전 하나 시티즌 감독직을 거쳐 2021년부터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고 있다. 2022년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지도력을 입증했다.

빼어난 위치선정, 슈팅력, 속도를 주력으로 가공할 만한 득점력을 선보였고, 폭넓은 활동 반경과 시야를 활용해 동료를 살려주는 플레이에도 능한 황선홍은 스트라이커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스트라이커였다. 또 센추리 클럽 가입부터 월드컵 4연속 출전, FA컵 우승과 아시안게임 우승 등 지도력까지 입증한 그는 현재 U-23 대표팀의 파리올림픽 준비와 국가대표팀 임시 감독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감독 경질과 선수단 내 불화를 겪은 국가대표팀과 U-23 대표팀을 이끌고 큰 무대를 준비하는 황선홍 감독에게 냉철함과 포용력, 건강과 행운 등 좋은 기운이 가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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