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정혜인 기자ㅣ지난주, 우리나라의 독립을 전 세계에 선언했던 3월 1일이 지나갔다. 삼일절은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부터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했던 날로, 우리나라 5대 국경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대한민국 민족은 각자의 방식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했다. 누군가는 무장 투쟁을, 누군가는 예술을 통해 그 마음을 나타냈다.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조명해본다. 그렇다면 ‘음악’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누가 있었을까.

첫 번째, 도산 안창호

[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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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애국가’. 굉장히 익숙한 노래지만, 작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꾸준한 논란이 있었다. 애국가의 가장 유력한 작사가로 거론되는 사람은 독립운동가 안창호와 친일파 윤치호 두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정부도 애국가 작사자를 찾았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만일 도산(島山)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한 게 사실이라면, 애국가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내외에서 힘들게 항일운동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다만, 여러 설 모두 근거가 부족해 지금까지도 애국가의 작사가는 ‘미상’이다.

두 번째, 청산리전투 이끈 김좌진

[사진/위키피디아]
[사진/위키피디아]

독립을 위해 힘쓴 사람으로는 김좌진도 많이 알려져 있다. 김좌진은 청산리전투에서 최대 승리를 거둔 것으로 유명한데, 작사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그는 ‘승리 행진곡’이라는 독립군가의 가사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승리 행진곡’이라는 곡은 우리나라에서는 ‘금기’인 곡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 당시 불렸던 일본 해군의 군가(군함 행진곡) 선율을 그대로 가져온 곡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굉장히 의아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여러 노래가 군함 행진곡의 멜로디를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 제국 치하의 사람들은 지겹도록 군함 행진곡을 들었기에 선율이 귀에 익은 탓이었다. 승리 행진곡에 얽힌 이 뒷이야기는 식민지화되었던 우리나라의 슬픔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 번째, 광복군가 작사한 박영만

[사진/Flickr]
[사진/Flickr]

우리나라 광복군에 대한 미군의 인식을 다시 정립한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바로 문학가이기도 했던 박영만이다. 그는 친일 문인들을 공격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발각돼 중국에 망명했다. 그리고 광복군에 입대해 광복군가 ‘압록강행진곡’을 작사해 광복군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이뿐만 아니라 미군전략정보처 안의 한국인 공작반에 특파되어 일본군 안의 정세에 관한 정보수집업무와 광복군의 존재가치를 선전했다.

박영만은 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원(宣傳科員)으로 활약하다가 한미연합군사훈련 실시도 성공시켰다. 이후 광복군총사령부 선전과장에 임명된 뒤에도 활발히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는 생전에도 대통령 표창과 건국포장을 받았고, 사망하고 몇 년 뒤에는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앞서 말한 인물들 이외에도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와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잊기 쉬운 아픈 역사, 지난 3·1절은 지났지만 독립기념일을 다시 한 번 기념하는 계기로 그 의미를 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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