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주역은 학생이었으므로 정권을 담당하는 능력은 없었다. 때문에 정치는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주도하는 형세가 되어 허정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허정 과도정부는 야당의 주장과 여론에 따라 내각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제3차 개헌을 실시(1960.06.15.) 하였다. 그리고 1960년 7월 29일 제5대 총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선거운동 양상이 민주당과 사회대중당 간의 치열한 대결로 압축 전개되었다. 하지만 승부는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고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은 각 4석, 1석으로 5석만을 얻었다. 

이로써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민죽당 구파의 윤보선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총리에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정권의 실권은 장면총리가 장악하였다. 

제2공화국은 미국식 자유주의 정치운영을 수행하여 언론이 활성화되고 자유를 중요시 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민족통일연맹을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혁신계 정치인들도 민족자주통일협의회를 구성하여 학생들과 연계하여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학생들과 혁신계정치인들의 통일론은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중립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 남북교류론과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가지려는 계획도 시도되었다.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그러나 강력한 개혁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정파싸움에 휘말려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윤보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당 구파가 신민당을 결성하고 나서면서 당내 분파 투쟁이 격화되었다. 게다가 한국민주당을 계승한 민주당은 현재의 민주당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보수적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부정선거 책임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에 소극적이었으며 민주화 요구시위, 사회 운동을 탄압하고 통일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1950년대 말 이후 경기침체가 심화되어 실업자가 증가하고 경인지역 공장의 80%가 조업중단에 들어갔다. 게다가 200백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봄철의 식량난인 ‘보릿고개’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장면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내걸고 부정축재의 회수, 특혜와 독점의 배제, 국민소득의 공정한 분배, 실업자 구제, 농어촌 부흥, 중소기업 육성 등을 내세우며 1961년 봄부터 댐건설을 비롯한 ‘국토개발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성안하여 다음 해 시행하기 위해 재원확보에 나섰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좌절되었다. 

장면 정부와 윤보선 대통령, 그리고 민주당은 이승만의 하야로 인해 어부지리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자기들끼리 세력다툼을 하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쿠데타로 인해 사라진 무능한 정부였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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