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유엔군이 남한을 재수복 할 무렵, 미국의 비공식제의를 받아들인 소련은 유엔을 통해 휴전회담을 제의하였다(1951.06.23.). 이로 인해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 사이에 휴전회담이 진행되었는데 군사분계선의 설정, 중립군 감시기구의 구성, 포로교환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여 2년여의 시간이 끌려왔다. 이렇게 시간이 끌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어 남한과 북한, 쌍방 간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첫 정전회담은 개성에서 1951년 7월에 열렸고 10월 판문점으로 회담 장소를 옮겼다. 그러나 이 회담도 전쟁포로 문제 등이 난제로 걸리면서 회담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휴전협정이 성사될 즈음 이승만 정부는 북진 통일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반공성향이 있는 인민군 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19563.6)했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았던 미국과 소련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휴전협정에는 유엔군을 대표하여 미국이 서명을 하였고 공산측을 대표하여 북한과 중국이 서명하였다. 한국정부는 이 휴전협정에 결국 서명을 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남북한을 합쳐서 약 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 제조업의 약 40% 이상이 파괴되는 산업피해를 발생시켰다. 또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이로 인해 서로에 대한 적대심이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독제 체제를 강화시켰다.

전쟁 중 수백만 명이 월남하였으며 전후 산업 개발로 인해 농촌 인구가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졌다. 또한 서구 문화가 무분별하게 유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3년 10월에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어떠한 외부의 침략에도 상호 협력, 대응한다는 내용의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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