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신탁통치의 찬성과 반대를 둘러싸고 양극화된 갈등 속에서 중도파 정치가들이 좌우합작을 통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고 좌우 온건파들도 여기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6년 5월 말 버치 중위의 주선으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6월 30일 하지의 지지성명으로 적극화 되었고 1946년 7월 10일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우익 세력과 좌익 세력이 각각 5명의 합작 위원을 선발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성된다.

위원회는 1946년 10월 우파와 좌파 간에 이견이 심했던 토지문제와 친일파 처리 문제 등을 중도적인 입장에서 조정하는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좌우합작 7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셋째,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넷째,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케 하여 실시하게 할 것.

다섯째,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여섯째,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일곱째,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를 절대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

이상의 중도정부를 지향하는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공산당과 한민당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고 박헌영은 평양에서 돌아온 1946년 7월 22일 이후 계급 대 계급 투쟁을 강조하는 ‘신전술’을 채택하여 반미적인 태도를 보이고 여운형 주도의 좌우합작 운동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좌익 진영의 분열을 일으켰다.

북한에서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대중정당’으로의 합당교섭에 의해 ‘북조선로동당’이 발족하였다. 그리고 3당 합당은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중에 남조선로동당준비위원회와 사회로동당준비위원회로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여운형의 사회로동당의 굴욕적인 합당의사를 무시하고 박헌영의 남로당은 독자적인 결당식을 갖고 농민해방과 노동자 보호를 통한 민주독립을 제창, 친일파, 지주, 친파쇼분자 등과 전면전을 선언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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