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3·1 운동을 청년층이 주도한 이후 이들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됐다. 청년층 역시 이를 인지하여 청년조직의 결성이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전국 251개 청년 조직이 연합하여 116개 회원 단체를 망라한 조선청년연합회(1920. 12)가 결성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와 화요회의 청년들은 전국적 중앙기관인 조선청년총동맹(1924. 04)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사회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청년운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어 먼저 결성되었던 조선청년연합회도 자진 해산하고 조선청년총동맹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청년총동맹은 청년계의 좌우 유일당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1920년 5월, 조선학생의 단결과 조선물산장려, 지방분열 타파 등의 계몽적 성격을 지닌 조선학생대회가 열리며 본격적인 학생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대회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을 망라하여 회원이 2만 명에 달하는 전국적 조직이 되었다. 

또한 1925년 9월에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라는 사회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돼 1926년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6·10 만세 운동은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하여 조선공산당과 학생계, 천도교 세력들이 민족전선 통일을 이루며 3·1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2의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시행하기 4일 전에 발각되어 일제의 방해를 받음으로써 당초의 계획대로 이 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계 속에서도 학생들이 주도하여 조직을 보존, 결국 6월 10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켜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등의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로써 학생 운동 세력이 항일 민족 운동의 중심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앞서 조선총년총동맹이 청년계의 좌우 유일당이 성사된 만큼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가 함께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후 민족 유일당인 신간회(1927) 결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6·10 만세 운동 이후 각급학교에 조직된 비밀 항일 결사를 통해 식민지 차별 교육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 등의 항일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던 중 1929년 광주 역전에서 일본 남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여 한국과 일본 학생 간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에 광주학생 300여 명이 목봉이나 삽 등을 들고 조선독립만세와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1929년 11월 3일). 

이에 일제는 광주 시내의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한국 학생 75명을 구속해 62명을 구금했다. 한편 일본 학생은 7명을 구속했다가 모두 석방하며 편파적인 수사를 한다. 이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로 인해 운동은 전라도 전체로 확산되었고 신간회는 조사단을 파견하게 된다. 

보도 통제 등의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생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서울까지 올라왔다. 그리하여 1930년 1월에는 서울 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3·1운동 이후 가장 큰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전까지의 학생운동이 식민지 교육의 차별에 불만을 갖고 진행된 것이었다면 광주학생운동은 식민지 통치 자체를 부정하는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 학생 운동이었다. 이로써 학생층은 항일운동을 주도하는 핵심 계층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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