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일본은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훈춘사건을 일으키고(1920년 10월)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전멸시키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이를 이미 눈치 챈 독립군은 험악한 산세를 자랑하는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하여 일본군 3개 사단 5만 명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일본군 3,300명을 사살하여 대파하는 청산리 대첩으로 일본군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여준다.

이에 일본군은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적인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한다(간도참변/경신참변_1920년 10월~1921년 4월). 

일본군은 서북간도 지역의 한국인 촌락을 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한데 모아 총이나 창으로 학살하였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했다. 또한 모든 민가를 소각하고 가축을 약탈하였으며 학교와 교회 등 한인과 관련된 것들에 대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잔혹한 수법으로 유린하고 방화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의 소식을 듣고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이 취재를 위해 현지에 도착하였지만 일본군에게 암살당해 한국 언론 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되었다. 이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지만 결국 당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전 세계에 낱낱이 폭로되고 말았다. 

‘독립신문’에 의하면 간도참변으로 인해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희생된 숫자일 뿐이며 실제로 학살이 진행되었던 기간은 3~4개월 달하므로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독립군들은 이 참변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하였는데, 러시아 공산당 내의 주도권 갈등에 휘말리는 자유시 참변을 맞이하게 되는 등 험난한 상황을 또다시 마주하게 된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