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병용 / 디자인 이연선]

▶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 출생-사망 / B.C 100.7.12 - B.C 44.3.15
▶ 국적 / 로마
▶ 활동분야 / 정치가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갈리아 전쟁 등을 수행하였고 후에 로마 1인자가 되어 사법개혁, 복지정책, 식민지정책 등 새로운 정치를 펼친 인물

-정권싸움의 패배로 반대파의 위협을 받고 도망가다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인 카이사르는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당시 로마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는 ‘벌족파’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민중파의 대표자는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카이우스 마리우스와 카이사르의 장인 킨나였고,벌족파의 수장은 술라였다. 카이사르는 가족의 영향과 자신의 정견을 통해 민중파를 지지했지만 벌족파가 세력을 얻자 죽음의 위협을 받아 로마 밖으로 도망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술라가 죽자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본격적인 정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로마에 카이사르를 알리다, ‘삼두정치’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타고난 언변과 지식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카이사르는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마 최고위 직인 집정관에 당선된다. 이를 계기로 카이사르는 본격적인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카이사르는 다양한 정책을 실현해나가며 민중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동시에 귀족세력의 견제를 받게 된다.

-우호적 정치로 갈리아 지역의 신임을 얻다

집정관을 역임한 카이사르는 로마의 속주였던 갈리아 지역의 총독이 되어 갈리아 지역 전체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비록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이후 보복 정치보다는 갈리아인들에게 정치적 자율권을 주거나 농경을 전파하는 등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며 지지를 얻었다. 갈리아에서 승승장구하는 카이사르를 본 로마 원로원 귀족들은 카이사르를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삼두정치’의 붕괴, 그리고 동료의 죽음

이 시기에 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전쟁 중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의 사이도 틀어지는 등 3명이 이끌던 삼두정치는 붕괴될 조짐을 보였다. 이를 본 로마 귀족은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여 카이사르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카이사르는 귀족들과 협상하려 했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깨닫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게 된다. 재빠른 카이사르의 부대에 당황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비운 채 도망가게 되고 폼페이우스는 피난 중 암살당하고 만다. 후에 폼페이우스의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끝없는 귀족층의 견제, 그리고 비극

카이사르의 공격 이후 귀족권이 약해진 로마는 카이사르 1인 천하가 된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위인 종신 독재관 자리에 앉아 통화 개혁과 시민권 확대, 사법개혁, 복지정책 실시 등 사회 각 방면에 새로운 정치를 펼쳐나간다. 그러나 1인 독재에 대해 불만을 가진 귀족세력은 카이사르가 황제가 될 것을 우려해 암살을 계획하고, 결국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 앞에서 카이사르가 총애하던 브루투스를 포함한 14명의 귀족들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한다.

카이사르는 황제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황제를 뜻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보여준 우호적인 정치와 군사적 능력 그리고 그의 인품이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비록 귀족층의 견제로 인해 비극을 맞이했지만, 민중의 영웅이었던 그는 현재에도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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