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해외에서는 세계적으로 민족자결주의가 태동하고 일본에서 2.8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국내에서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여 독살 의혹이 생기는 등 한국 국민들의 일제에 대한 불만은 한없이 고조되었고 이에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3.1운동은 1기와 2기로 구분이 되는데 제1기는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한 것을 가리킨다. 1919년 2월 27일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 종교계 대표 33인은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사정상 참여하지 못한 4인을 제외한 29인의 민족대표들 음식점 태화관에 집결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이들은 이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 삼창을 한 후 연락을 받고 온 일경들에게 연행되었다.
 
3.1운동의 꽃은 형식저인 의식만 거행된 1기가 아니었다. 학생과 시민층이 주도를 한 2기가 진정한 의미의 3.1운동이었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 장소를 변경하는 바람에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오후 2시 30분경 독자적으로 선언식을 거행하고 그대로 시가지를 향해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3.1운동 공약 삼장
1.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2.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3.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시민들은 공약 삼장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비폭력 평화시위를 전개하여 단 한 건의 폭행사건도 발생시키지 않았다.
 
이를 시작으로 같은 날 평양,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당시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과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같은 날에 만세시위가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종교 조직에 의해 날짜와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는 등의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세를 이어 지방 지역의 장날 시위가 전개되기 시작하여 상인들이 철시를 하거나 농민들이 횃불 시위를 하는 등 다양한 전개양상을 보였다. 또한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면사무소나 헌병주재소, 토지회사 등 한국을 좀먹고 있던 일제 시설들을 습격하는 폭력적인 저항으로 변모되기도 했다.
 
국내에서의 3.1운동은 국외에도 파급되어 미국, 만주, 연해주 등 한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등 억압되었던 민족의식을 한 번에 폭발시키는 엄청난 파급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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