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일제의 한국 강점 직후, 정치성을 띤 모든 단체를 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종교계는 그나마 유지될 수 있어서 일제의 통치하의 사회구조에서 학생층과 연계하여 민족 운동을 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종교단체 외에는 없었다.

1918년 11월 28일, 한국은 여운형이 대표 명의로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중국에 온 윌슨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에게 전하여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전해 줄 것을 청탁했다. 이어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고 선우혁, 김철, 서병호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국내와 일본으로, 여운형은 만주, 노령으로 보내 지역 사회 지도층과 종교계 인물 등과 회합하여 정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독립 운동의 방법을 협의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 황제가 식혜를 먹다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이에 일제가 독살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고종이 일제의 독립 운동 포기 종용을 끝까지 거부하였고 이강과 함께 독립 운동을 후원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승하했기 때문이다. 이에 국민들의 분노가 극으로 달하기 시작했다. 

국외에서는 1918년 11월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가 만주 길림에서 발표되었다. 조소앙, 이상룡이 집필하고 대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해외 망명 운동가 39인의 명의가 포함된 해당 독립선언서는 일본의 합병은 무효이므로 무장 투쟁을 통해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는 내용이었다. 

동경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동경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가장하여 회합을 열고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한국의 독립을 일본정부와 각국 공사에게 청원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2월 8일에는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이다.

이런 국내외의 조직들의 활동은 국민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일깨워 주기 시작했고 각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에 귀국하여 독립 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는 등 3.1운동의 시작은 점점 무르익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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