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한반도의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은 국내외의 여러 정세가 반영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국외로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서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 구 제국주의 열광과의 전쟁은 결국 독일의 패전으로 종식되었다. 이로 인해 전 세계는 군국주의, 제국주의가 후퇴하고 인도주의, 평화주의, 민족자결주의(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의 시대가 온다는 믿음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이는 일제의 치하에 있는 우리민족에게 독립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생겼는데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인 10월 혁명이 일어나 제국주의의 기초를 붕괴시키고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하게 하였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적인 식민지 정책과 전쟁을 전면으로 부정하게 된다.
 
1917년 11월, 신생 소비에트공화국의 레닌은 제정러시아 치하의 100여개 이상의 피압박민족에 대해 민족자결의 원칙을 선언함으로써 한국을 위시한 많은 식민지 민족에게 강렬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에서 잠시 눈을 뗀 것을 계기로 동맹국이었던 영국이 독일과 교전상태에 들어간 것을 구실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의 영토였던 남양군도의 섬들을 점령, 청도를 중심으로 한 산둥반도에 설치되어 있던 독일의 조차지를 점령하였다.
 
이런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에 21개 요구조항을 제시하여 중국을 실제적인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
 
또한 미국 대통령 윌슨은 연두교서에 ‘민족자결주의(1918. 1. 8)’ 14개조 원칙 가운데 제5항 ‘전쟁의 결과로 국제적인 고려의 대상이 될 독일 식민지 및 기타 식민지’라는 조항을 두어 식민지들의 독립을 시사하는 원칙을 밝혔다. 이는 열강 간의 국제협약과 국제연맹하의 위임통치라는 형식을 빌려 독일 등 패전국이 보유한 식민지를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처리하여 힘을 빼겠다는 의도였을 뿐 승전국에 포함되어 있는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은 그에 포함이 되지 않았다.
 
이는 파리강화회의(1919. 1. 18~1920. 1. 21)에서 여실히 드러났는데 이승만과 정한경, 민찬호 3인은 이 회의에 참석하려 했지만 여권 발급이 거부당하면서 참석도 할 수 없었다. 민족자결주의는 그들만의 파티였던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로 인해 폴란드, 헝가리, 핀란드, 체코, 유고슬라비아 등 독일과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발트해 연안 국가들이 독립하여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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