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9세기말 조선은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유학생들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국권을 강탈당한 후에는 경제적 수탈로 인한 몰락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해도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과 일제 자본가의 무자비한 착취로 인해 이주민들은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 학회와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이광수, 최팔용 등이 조선 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재일본도쿄조선YMCA 현 재일본한국YMCA)에서 1919년 2월 8일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2.8 독립선언으로 이를 기점으로 2월 내내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동경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광수로 인해 조선과 해외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 소식은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불씨가 된다. 

일본의 재일 조선인에 대한 만행은 비단 착취와 민족 차별뿐만 아니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시즈오카, 야마나시 등 관동 지방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인해 당시 총 4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혼란을 막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혼란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치달았고 이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선택한 것이 제일 만만한 조선인이었다. 일본 정부는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렸고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은 아예 지진이 발생한 원인까지 조선인들 때문이라며 자경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관헌들과 함께 조선인들을 찾아 구타하고 학살했다.

이 때 사망한 피해 조선인은약 2천~6천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일본이 저지른 만행 중 가장 심각했던 사건으로 남았고 나라를 잃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이런 만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무력감과 굴욕감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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