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기세를 탄 일본은 멈추지 않고 침략전쟁을 이어갔고 한국은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일차적인 병참기지의 역할을 하느라 경제구조가 그에 맞게 개편되어갔다. 

일제는 일본의 농촌진흥운동과 보조를 같이 하여 농업공황으로 파탄에 빠진 농촌의 부흥재건이라는 이름하에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봄철 보릿고개 퇴치, 자력갱생, 지방 진흥 등의 슬로건을 표방했지만 실은 그저 조선지배 정책의 재편성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쌀을 무분별하게 본국으로 실어 날랐던 일본은 쌀값이 폭락을 하는 농업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진행되었던 산미증식계획이 중단되었는데 이로 인해 수출을 목적으로 쌀을 재배하던 농민들은 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총독부는 제대로 수탈하기 위해서는 키워서 수탈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국의 공업화를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침략전쟁이 심화되자 군량으로 사용할 식량을 수탈하기 위해 중단되었던 산미증식계획이 부활하였고 일제는 농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생산된 농작물의 일정량을 바치게 하였다. 또한 남쪽에서는 누에를 치고 북쪽은 양 사육을 하는 남면북양 정책을 강요하였고 공업 원료의 증산을 꾀했다. 

이후 전시체제 하 통제의 기본 목표로 생산력 확충계획(1936)을 수립하여 철강, 비철금속, 석탄, 전력, 펄프, 양모 등의 군수물품 생산을 확충하였고 무기제작에 부족한 금속을 보충하기 위해 쇠붙이 공출제(1944)를 시행해 식기, 농기구 등의 쇠붙이와 금반지, 은반지 등 금속을 강제로 공출하기도 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방현금을 강제로 모금하거나 가축증식계획 등 무엇이든 증식하여 수탈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 하면서 ‘국가총동원법(1938)’을 제정하여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을 강화했다. 이 법으로 인해 지원병제도(1938)이 시행되어 18,000명이 전쟁이 동원되었는데 이 지원병 제도는 황국의식을 주입시키기 위해 실시된 것으로 자격이 엄격히 제한되는 것으로 40년대 병력 부족을 해소시키기 위해 시행했던 징병제도와는 다른 개념이다. 

1939년에는 강제징용제도가 시행돼 일제 말기까지 1백만 명 이상의 조선인을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끌고갔다. 이들은 탄광이나 비행장, 군수공장 등 철도 등의 공사장에 군대식으로 편제되어 강제수용 된 채 노예처럼 혹사당했다. 특히 군사지역에 관련된 공사를 끝낸 후에는 군사기밀을 지킨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는 전쟁이 끝으로 치달을 즈음에는 병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나이가 어린 학생들까지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터로 끌고갔으며 강제징병제(1944)를 통해 20만명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았으며 12세에서 40세까지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 20만 명을 강제로 동원해 일본과 한국 내에서의 군수공장에서 일을 시키거나 전쟁지역의 전쟁터로 보내 위안부가 되게 하는 ‘여자정신대근로령’을 시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쟁이 막바지로 갈수록 일본은 잔학한 본성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한국인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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