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제의 한국에 대한 횡포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일제는 경제 대공황을 맞이하고 대륙 침략을 강행하면서 한국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1929년 발생한 경제 대공황은 전 세계의 경제를 뒤흔들었다. 각국은 보호무역 체제에 돌입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을 하나로 묶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한국의 노동력과 자원은 일본에게 철저하게 수탈당했다. 

또한 일제는 중국대륙을 침략하려는 야심을 실행에 옮겼고 한반도를 그 전쟁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개된 중일전쟁(1937년 7월)과 태평양전쟁(1941)을 일본이 일으킬 때 마다 일본은 한국의 노동력을 전력으로 변환하였고 물적 자원은 군수로 수탈했다. 전쟁은 자신들이 일으키고 그에 따른 비용을 한국에게 지게 한 것도 모자라 한국인들을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이렇게 한국인들을 희생시키는 명분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황국신민화 정책이다. 한국인들을 황국(일본)의 신민으로 만들어 타국의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이 아닌 국민의 일원으로서 의무를 행하는 것 같이 보이게 하려는 술수였다. 

일제는 한국인을 황국신민화 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먼저 개정신사규칙(1936년 8월)을 시행해 면당 1신사를 세우게 하고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해 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이에 거부를 하면 투옥하였으며 교회를 폐쇄하기도 했다. 

또 1936년 미나미 총독 부임 이후 일제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은 조상에서 시작됐다는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강조했다. 침략전쟁을 진행하면서 양국의 국민이 하나의 민족이고 국민도 하나라는 일체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현실은 극심한 천대와 수탈밖에 없었다. 

그리고 1940년에는 한국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의 씨명제를 설정해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제도를 시행하였다. 또한 모든 주민들로 하여금 일왕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황국신민서사’를 일본어로 외우게 강요했다.

또한 중일 전쟁 이후 전국 지방조직에 10호 단위의 애국반을 두어 정기적으로 반상회를 열어 총동부의 시책을 따르도록 했다. 또한 일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말로는 같은 국민이 된다고 했지만 이는 모두 한국을 수탈하기 위해 뿌려놓는 밑밥일 뿐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본색을 드러내고 본격적인 수탈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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