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일제는 자신들이 급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자본주의적 공업발전을 저지하고 식민지로서 식량, 원료의 공급지이자 상품시장으로 묶어두기 위해 한국에 1910년 12월 29일 회사령을 내렸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회사를 설립하려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규정이 생겨 고부가가치 산업은 일본에게로 가고 극히 낮은 이윤의 산업은 한국인들에게 허가가 되었다.

그러다 일제는 일본 자본의 한국 시장 침투를 더욱 촉진시키기 위해 회사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완화하여 회사령을 철폐(1920)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자본의 투자가 증가하게 되었는데 일본인들은 주로 이윤이 크게 나는 상업과 공업, 운수업에 치중하였다. 특히 ‘조선수력전기회사’나 부전강 수력개발 및 함경도 흥남에 건설한 질소비료회사가 큰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회사령이 철폐되어 한국인 자본가들도 성장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호남지주 출신의 사업가인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 주식회사’나 조만식의 평양 메리야스 공장, 부산의 고무신 공장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들은 중개상업이나 고리대, 토지 투기 등 비생산적인 부분에 투자하여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일본인들의 투자가 커지자 이들의 높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비용을 낮춰야 했다. 이에 일본은 식민지 국가의 노동력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데,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을 시키고 민족 차별을 하는 등 탄압을 하며 혹사시켰다. 이는 1920년대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운동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는데 1929년에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궐기하는 등 일제 치하 최대 규모의 파업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는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를 완전히 철폐시켜 일본 상품을 한국에 원활히 들여왔다. 이로 인해 한국 기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런 모습을 본 한국인들은 자국의 물건을 사용하자는 물산 장려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자원과 경제 등 빼앗을 수 있는 것들은 골수까지 빨아먹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런 모습에 굴하는 모습만을 보이는 것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미약하나마 저항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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