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안으로는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단행하고 밖으로는 침략활동을 하는 등 부국강병을 꾀한다. 그 중 가장 가까운 나라인 조선이 타깃이 되어 버렸는데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개항을 시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친정선언과 명성황후 일파에게 밀려 실정을 한 후 일본은 개항을 시킬 수 있는 기회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는 것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일본은 자신들이 무력으로 인해 개항 한 것처럼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해 무력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1875년 9월 20일 운요호는 서해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여 식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보트에 일본군을 태워 연안을 정탐하며 강화도 초지진 포대 근처까지 접근했다. 

이에 수차례 접근하지 말라고 했던 조선군은 일본군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운요호 역시 포격으로 이에 응수했다. 조선군의 포는 운요호에 닿지 않는데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진행했던 일본의 최신식 군함 운요호의 포는 여지없이 초지진을 강타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초지진과 영종진이 파괴되었고 기세를 탄 일본군은 육상 전투부대를 상륙시켜 강화도를 약탈하고 방화하며 살인을 자행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군은 35명의 전사자와 16명의 포로가 발생했으며 대포나 화승 총 등 무기들을 약탈당했다. 또한 강화도 일대의 백성들까지 살해당하고 약탈당하는 등 그 피해가 막심했다.

도발도 일본이 먼저 하였고 피해도 조선 측이 크게 입었지만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돌렸고 이에 대한 보상의 내용이 들어 있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국제적 조약이자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불평등 조약,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조선의 국권이 일본에게 빼앗기는 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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