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일본의 국모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에 신변의 위협을 크게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간으로 피신을 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안위와 경제 주권은 일본을 위시한 열강들에게 침식되어 가고 이들에게 휘둘리는 조선에는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라는 백성의 주문들이 이어져 왔다.

이에 1896년 7월 2일 개화파의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가 창단되었고 자주적 수구파들은 연합하여 고종이 다시 환궁하는 것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1897년 2월 결국 고종은 환궁하였고 지난 1884년과 1894년에 추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와 아관파천으로 중지되었던 칭제건원(왕을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사용한다)을 추진하여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9월에는 원구단(圜丘壇)을 세워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려 대한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제국을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제(政制)문제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이미 열강에게 많은 이권을 빼앗긴 상태이고 황제의 동의만 얻으면 나라의 주권과 자원을 뺏길 가능성이 큰 전제군주제 보다는 외국과의 조약을 의회의 동의를 얻어 통과해야 하는 입헌군주제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친 러시아 성향인 수구파는 입헌군주제가 황제의 지위를 약화시키고 불필요한 민권의 신장을 불러온다며 전제군주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고종은 수구파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이 성립한 다음해인 1898년부터 독립협회와 친러 수구파는 정치적으로 대립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권에 관련하여 부딪치게 되었다. 

수구파는 러시아의 요구에 동의하여 절영도(현재 부산 영도)의 토지를 석탄고기지로 러시아에 조차(빌려주는 것)하려 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국토의 일부를 외국에 조차해 주는 행위 자체가 침략의 시작이라며 이를 격렬히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1만 여명의 대규모 시민들을 결집시켜 ‘만민공동회’라는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만민공동회는 러시아로의 절영도 조차 요구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기지 철수 등 대한제국이 외세에 흔들리지 않음을 결기했다. 

게다가 1898년 3월 12일에는 독립협회가 개최하지 않았음에도 시민들이 서울 종로에서 자발적으로 모여 제 2차 만민공동회를 개최, 1차 만민공동회의 결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였고 이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정부는 만민공동회가 요구했던 절영도 조차요구를 철회, 국내 일본 석탄고기지를 철수시켰으며 한러은행과 군사교관 재정고문을 철수시켜버렸다. 

게다가 이를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을 하여 대한제국은 자주국가임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지만 수구파의 모략으로 인해 그 기회를 날려버리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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