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세계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을 저지르고 고종은 이 사건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신변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세력을 얻은 일본은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여 군제개혁, 단발령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지만 국모를 시행한 일본의 주도와 신체발부 수지부모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라는 유교 사상에 반하는 정책은 조선의 유생 및 백성들에게 큰 반감을 사게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서게 된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를 이용하여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중앙의 친위대까지 동원해야 했다. 

이런 수도 경비의 공백을 틈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러파 명성황후 시해로 인해 잃은 자신들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불안에 떨고 있는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어렵사리 러시아 공관에 도착한 고종은 러시아 군대의 호위에 안정을 되찾았고 명성황후를 시해에 분노하여 친일파 대신들인 김홍집(총리대신)·유길준·정병하·조희연·장박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 체포하여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김홍집, 정병하는 퇴청하는 도중에 체포당하여 타살당하고 어윤중은 피신했으나 지방에서 붙잡혀 살해됐다. 유길준, 조희연, 권형진, 우범선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함으로써 조정은 친미, 친러 내각으로 구성하여 일본식으로 개혁했던 내각을 의정부로 다시 돌려놨다. 그리고 친일내각에 대항하여 봉기한 의병들의 항쟁 역시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게 된다.

일본은 고종에게 독립국가임을 상기시키며 환궁을 요청했지만 고종은 신변의 불안을 주장하며 환궁을 거절했다. 

일본이 악독하긴 했지만 러시아 역시 공짜로 고종의 안위를 지켜준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친러 세력이 득세한 것을 틈타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되었고 이 대가로 러시아와 구미열강은 각 지역의 삼림채벌권과 광산채굴권, 경인 및 경의선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을 넘겨야 했다. 또한 아관파천 기간 동안 러시아는 조선 내정에 간섭하여 조선의 상황은 늑대의 아가리를 피해 또 다른 늑대 아가리에 머리를 넣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국부인 국왕이 가장 안전해야 할 궁에서 신변의 위협을 받아 타국의 공관으로 도피했다는 점에서 이미 조선의 망조를 보인 사건이다. 또한 일본 뿐 아니라 조선에 이권을 얻으려는 러시아, 미국 등의 열강들이 조선에게 보이는 탐욕을 뿌리칠 힘이 없다는 것도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인해 여실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제 조선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일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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