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하응(李昰應, 1820~1898 / 훗날 흥선대원군)은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8세손으로 태어나 실질적인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인 남연군이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왕권에 좀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당시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하는 상황이라 왕위에 가까운 왕족이라는 것은 자칫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견제를 받아야 했다.

때문에 안동 김씨들은 똑똑한 왕을 원하지 않았고 이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하응은 이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건달처럼 행세하며 훗날을 도모했다.

막강한 안동김씨 세력을 뒤에 업고 있던 순원왕후가 사망한 이후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풍양조씨 신정왕후가 대비가 되어 왕실의 최고어른이 되었다. 순원왕후 때문에 비참한 궁중생활을 했던 조대비는 안동김씨에게 친정의 원한을 갚으려 하였고 이하응은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와 친교를 맺어 조대비에게 접근하였고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지명하도록 설득하였다.

1863년 12월 초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철종의 후사로 지명했다.

명복은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이하응은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흥선대원군)이 되었다. 고종이 어린나이라 국정을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대리정치)를 하였고 조대비는 정책 결정권을 흥선대원군에게 주어 흥선대원군에게 왕권을 주었다.

권력이 생긴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 시절, 건달 행세를 하며 온몸으로 느꼈던 문제점을 개혁 정책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우선 세도정치를 몰아내기 위해 안동 김씨 주류들을 정계에서 몰아내면서 세도정치의 핵심 기구였던 비변사를 폐지하며 원래의 정승회의 기구인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또한 신분의 구별 없이 호를 단위로 세금을 징수하는 호포법을 실시하여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탕평정치를 통해 당파에 구애 받지 않는 인재를 등용했다.

그리고 봄에 미곡을 빌려 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환곡제도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민간에서 곡식을 빌려주는 사창제도를 실시해 지방 관리의 부정을 막고 민생을 안정시켰고 양반들에게서도 세를 받았기 때문에 국고도 든든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강력하여 왕권 강화를 위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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