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 전기에는 전문 기술자인 공장(工匠)을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급관청에 속하게 하고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하게 하였다. 관공장은 1년에 2~3교대의 공역일에, 해당 작업장에서 60세까지의 공장들은 거의 무상으로 종사하였다.

 

15세기 후반에는 대부분의 공장이 작업장에 동원되는 대신 장포만 바치는 납포장과 관청 수공업장에 고정적으로 고용되는 관장으로 나누어졌다. 따라서 납포장은 국역 동원에서 벗어나 민간 수공업에 종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들이 내는 장포는 관장의 임금에 충당되었다. 때문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관청 수공업은 축소되어 갔고 등록제에 의한 장인 확보도 줄어들었다.

16세기 이후 부역제가 몰락하게 되면서 관청에서 관리하는 수공업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각 관청의 작업장에서는 관수품의 충당을 위해 민간 기술자를 고용하는 하청의 개념이 생기게 되었고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민간 수공업자가 증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종이, 화폐 철물 등 소비 규모가 크고 많은 원료가 필요한 제품들은 많은 자본이 필요했다. 때문에 많은 자본을 가진 상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상인은 원료와 대금을 미리 빌려 주고 생산된 물품을 사들였다. 이 때 생긴 말이 물주(物主)다. 따라서 17~18세기에 민간 수공업자들은 원료 구입과 제품 판매 등에서 상업 자본(공인)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지방 장시가 크게 확장되었고 시장권이 넓게 형성되면서 수공업자는 자신의 자본으로 상품을 대량으로 제조하여 점촌(店村:가게)을 만들어 직접 팔기도 하고 보부상에게 공급하여 판매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특히 제조 규모가 컸던 것은 속과 놋그릇(유기) 등으로 경기도 안성과 평안도 정주의 납청은 놋그릇 생산지로 가장 유명했다. 안성장에서 유기를 맞추면 마음에 쏙 든다는 ‘안성맞춤’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점촌을 운영하는 수공업자들은 자신의 자본으로 공장을 설비하였고 원료를 구입했으며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을 통해 물품을 제조했다. 이렇게 독립 수공업자가 발달함에 따라 관장제 수공업은 조선 전기의 10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쇠퇴했다. 이에 공장안을 폐지하였고 장인들은 장인세를 내고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어 공산품 생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국가의 관리 하에 있어 생산의 한계가 있었던 수공업. 대동법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도시 인구의 증가는 공산품의 수요를 불러와고 이는 조선 후기, 민간 수공업자의 증가를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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