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 전기에는 시비법(토양이나 작물에 비료를 공급하는 농작법)이 확대 시행되어 논과 밭 모두에서 연작을 하는 상경법이 일반화 되었다. 또한 15세기에는 가뭄에 대비하여 전국에 3천 여개의 저수지를 만드는 등 수리(水利) 시설도 확충하였다.

 

또 체계적인 농사를 위하여 세종 11년(1429)에는 지방 농민들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 농법서인 ‘농사직설’이 편찬되는 등 정부가 농업을 장려하여 수확량의 증대를 가져올 수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산지가 많은 자연조건 때문에 수전(水田/논)의 비중은 28%에 불과하여 한전(旱田/밭)에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농사직설에서는 수경법, 건경 직파법(마른땅에 씨를 뿌리는 법), 이앙법(묘종법/모내기법)을 소개했는데 이 중 논에 씨를 뿌리는 수경법이 유행하였고 이앙법은 가물면 피해가 컸기 때문에 남부의 일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한전 농업을 많이 했는데 대표적인 작물로는 콩, 기장, 조, 보리 등이다. 이 중 조선 전기에는 조와 기장을 중하게 여겨 많이 경작하였다. 또한 평평한 토지에 씨앗으 뿌린 후 고랑을 파 씨앗을 덮는 농종법이 보편적으로 시행되었고 기장, 조, 콩, 보리 등을 2년 3작하는 윤작법이 확대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 문익점에 의해 수용되었던 목화가 거의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무명(면포)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의 의생활이 매우 개선되었다.

이렇게 백성들은 조선 초기, 발달된 농업기술로 인해 경제적인 상황이 호전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했었다. 하지만 수취 체제의 문란과 지주전호제(소작농)의 확대로 인해 몰락하는 농민들이 증가했다.

이로 인해 명종 14년(1559년)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농민무장활동인 ‘임꺽정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에서 농민에게 해 주는 일이라고는 구황촬요(잡곡, 도토리, 나무껍질 등으로 구황 하는 것)를 보급하거나 유망을 통제하기 위해 호패법이나 오가작통법을 실시하는 정도라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지방 양반들은 향약을 시행하여 농촌사회를 안정시키려 했다.

가장 큰 경제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농민들. 농사직설 등의 훌륭한 기술로 인해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너무 많이 빼앗겨 그 박탈감은 더욱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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