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죽음 후 영조는 맏아들이었던 효종세자(진종)을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하였고 세손을 효종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해 세자의 지위를 갖게 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과정에서 정조가 세손의 위치로 오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자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매우 껄끄러워진 사람들이 생겼다. 그가 권력을 가지게 되면 자신의 아버지를 해하게 한 무리들을 먼저 제거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조를 비방하거나 그가 거처하던 존현각에 침입하여 염탐하고, 암살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거기에 대리청정이 결정될 당시,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제기사며 대리청정을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는 영조 말년인 1775년 대리청정을 시작하였고 영조가 다음해에 승하하면서 2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자처하고 사도세자를 모해한 노론 관련자 중에서 홍인한, 김귀주, 정후겸 등 척신 계열의 일부만을 처벌했다. 동안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정리했다. 그리고는 각종 개혁 정치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책이 사림의 정치 원칙인 의리를 소홀히 하고 단순히 여러 당파의 인재를 끌어다 쓰는 데 그쳤기 때문에 척신정치로 돌아갔다며 영조의 탕평 정국을 비판했다. 이에 정조는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르는 준론 탕평책을 시행하였으며 그 동안 소외되었던 남인들을 중용하였고 심지어 자신의 정적이었던 벽파 세력까지 협력 세력으로 포섭하였다.

정조는 양반, 사족 중심의 국가 운영을 탈피하여 소민을 보호하는 민국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기구를 원했다.

정조는 1776년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치하여 정약용, 이가환 등의 인재를 등용했다. 또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서얼 출신으로 능력은 있으나 신분상 외면을 받았던 이들을 규장각 검사관에 등용하기도 했다. 규장각은 숙종 때 설치되었다가 폐지 된 왕립 도서관으로 학문정치의 중심이 되는 상징적인 기구다.

또한 국왕 친위대로 장용영을 설치하였으며 대전통편을 편찬(1785)해 법전을 재정비해 국가의 집권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수령의 권한을 확대하여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함으로써 지방 사림의 세력을 약하게 해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1789년 정조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만천명월주인옹자서)를 창덕궁 존덕정 현판에 친필로 쓰면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명월을 자신에 비유하여 온 백성에 직접 닿는 지고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하여 강력한 왕권을 천명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으면서도 영조에게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강하였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뒤, 세종 이후 최대의 발전기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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