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단순한 예절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던 예송이 국가의 큰 당쟁이 되어 집권당까지 바뀌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서인과 남인들은 서로 집권을 하기 위해 이를 계속 이용하려 하였고 결국 숙종은 1679년 3월, 앞으로 예론을 가지고 문제 삼거나 상소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역률로서 다스리겠다고 하여 예송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당쟁이 극심하고 붕당간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숙종의 집권 초기에는 이미 남인이 집권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숙종은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아버지인 현종의 수하였던 이들을 그대로 신뢰하고 중용하고 있었는데 이 당시 집권하고 있던 남인의 우두머리는 영의정 허적과 외척인 병조판서 김석주였다.

그런데 숙종 재위 6년, 사건이 터졌다. 영의정 허적이 조부인 허잠이 시호를 받은 것을 기념해 잔치를 열었다. 그런데 그날 비가 내리자 궁궐의 유악(기름 먹인 천막)을 허가 없이 가져다 사용했다.

동시에 숙종 역시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영의정인 허적의 잔치를 걱정하여 유악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하사가 있기 전에 허적이 마음대로 궁궐의 물건을 갖다 쓴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숙종의 왕권을 무시한 월권행위로 다가왔다. 숙종은 매우 대노했고 이는 곧 남인이 집권하고 있던 조정을 서인으로 모두 갈아치우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삼복’이라는 왕족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민다는 상소가 접수돼 삼복과 허견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또한 남인의 우두머리격이었던 허적과 윤휴, 유혁연이 사약을 받아 남인의 주요 인물들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를 경신환국(1680)이라 한다.

경신환국 이후 주요 관직은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또한 1680년(숙종 6) 10월 인경왕후가 별세하자 이듬해 5월 인현왕후 민비를 들였는데 이 역시 대표적인 서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로 인해 서인은 10년가량을 집권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또다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숙종은 정실인 민비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하지만 1688년 후궁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왕자가 태어났고 숙종은 이에 크게 기뻐했다. 그는 왕자를 곧바로 원자로 삼았고 장씨를 희빈에 책봉했다.

남인에 가까운 장씨의 희빈 책봉과 왕자의 세자 책봉은 서인들의 극심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고 이에 진노한 숙종은 또다시 서인들을 쫓아내고 주요 관직을 남인들로 교체했다. 이 과정에서 서인의 대표인 송시열은 유배를 가 사약을 받았고 민비는 폐출당해 사가로 보낸 뒤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았다. 이를 기사환국(1689)라 한다.

마지막 환국은 숙종 중반에 일어났다. 거듭된 환국으로 인해 남인은 집권을 하긴 했지만 숙종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이런 와중에 1693년 숙종은 숙원 최씨를 후궁으로 받아들인다. 최씨는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으며 반대로 중전인 장씨는 그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가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고발이 접수되었고 이에 숙종은 또다시 환국을 해 서인을 주요 관직에 앉히고 송시열 등 유배당하고 사사당한 인물들을 복관시켰다. 그리고 중전이었던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민씨를 다시 중전으로 복귀시켰다. 이를 갑술환국(1694)라고 한다.

7년 뒤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종안 희빈 장씨와 그 일가들이 인현왕후 민씨를 주술 등으로 저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희빈 장씨는 사사를 당하고 장희재는 처벌당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남인들은 더 이상 힘을 쓰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환국을 통해 자신의 힘을 키우는데 성공한 숙종. 하지만 환국이 숙종의 감정적인 요인에서 발단한 것과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 소모적이었다는 부분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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