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은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나는 나라였다. 그만큼 명분을 중시했다. 특히 왕도의 예라는 것은 그 왕에 대한 평가나 정통성에 대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조정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예송이란 이런 예절에 관하여 효종이 사망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한 논쟁으로 효종이 장자가 아닌 차남 출신의 왕이기 때문에 사망한 효종의 어머니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적통이었던 효종의 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여 자연스럽게 그의 아들인 이석철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인조에 의해 총애를 받던 차남 효종에게 왕위가 돌아가 당시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효종이 논란거리가 없는 적통이었다면 원래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3년 동안을 상복을 입어야 한다. 하지만 적통이 아닌 차남이었기 때문에 3년을 상복을 입을지, 1년을 입을지에 대한 남인과 서인 붕당들의 논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인조 이래 남인은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겨 집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때문에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했을 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을 서인들의 주장으로 1년으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1660년 음력 3월, 남인인 허목 등은 효종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대부에 준하는 1년 복상을 적용했다며 서인을 맹렬히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서인인 송시열, 송준길 등은 효종이 차남인 점을 들어 1년을 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남인은 효종이 정실이 낳은 차자이기 때문에 서자가 아닌 적통이라고 주장하여 3년 상을 찬성했지만 서인은 장자가 아닌 경우 모두 서자로 본다고 주장해 1년을 계속 주장했다. 결국 이 논쟁은 당시 권력이 가장 높았던 서인 송시열이 뜻을 굽히지 않아 그대로 1년이 채택되었고(기년설), 권력을 빼앗아 오려던 남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서인은 더욱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 논쟁을 소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그 후 1674년(현종 15년) 효종의 비(妃)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금지되었던 예송이 다시 발생했다. 이를 2차예송, 또는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 한다.

기해예송은 남인이 서인을 공격했지만 갑인예송에서는 같은 서인인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과 처사촌 김석주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송시열 제거하기 위해 남인과 연계했다.

자의대비는 효종의 비를 장자부로 본다면 1년을, 차자부로 보면 9개월의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 현종은 아버지인 효종이 차남이라고 주장한 서인들에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번 예송에서는 선왕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 대해 배은망덕하다며 기년복을 찬성했다.

이에 남인이 이번 예송에서는 승리하게 되어 서인인 영의정 김수홍 등이 정계에서 쫓겨나고 남인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1674년 현종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승하하게 되었고 뒤를 이어 13세의 숙종이 왕위에 올랐다.

진주 유생 곽세건은 숙종에게 효종과 현종의 적통성을 부정한 송시열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숙종은 현종의 묘지명에 그 사실을 기록하려 했는데 송시열과 그의 제자 이단상은 이를 거부해 숙종의 분노를 샀다.

숙종은 송시열을 덕원부로 귀양 보냈고 이에 서인들은 송시열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기회를 탄 남인들은 서인 세력들 역시 처벌하려 하여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다시 격화됐다.

이에 숙종은 1679년 3월, 앞으로 예론을 가지고 문제 삼거나 상소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역률로서 다스리겠다고 하여 예송을 금지시켜 갑인예송은 종결된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상복을 얼마나 오래 입느냐가 무슨 문제거리나 되나 싶지만 당시에는 매우 예민한 사항 중 하나였다. 정권을 장악했던 서인들도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는 생각에 하나의 다른 의견으로 예송을 받아들였지만 이것 때문에 정권이 바뀌는 상황에 이르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더욱 격화된다.

단순한 예송이었지만 그 속에는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권력 찬탈의 의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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