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키워드 한국사] 북방의 오랑캐였던 후금이 무력으로 명을 쫓아내는데 성공할 무렵 사대를 하고 있던 조선은 후금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이에 명을 멸망시키는데 있어 조선을 눈엣가시로 보던 청나라가 침략한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호란을 종식시키고자 인조는 청 태종에게 ‘3배 9고두(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면서 땅바닥에 머리 9번 박는 행위)’를 하는 사상 최악의 굴욕을 맛보아야 했고 효종은 이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효종(1619)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로 인조반정 후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작되었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강하고 인성이 훌륭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효종은 인조의 명령으로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 아들)과 함께 먼저 강화도로 피난했다. 그러나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1월 30일 효종은 부친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를 행하는 굴욕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항복에 따른 조약에 따라 2월 5일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중국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는 이 여정에서 세 살밖에 안 된 딸이 등에 업혀가다 병사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그는 볼모로 끌려가서는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와 명나라의 격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렇게 효종은 그렇게 볼모로 지내면서 아버지 인종의 굴욕, 딸의 죽음으로 그의 청에 대한 반감은 점점 쌓이고 있었다. 효종은 1645년 5월 14일 귀국을 했는데, 효종보다 앞서 귀국한 막역한 사이였던 형 소현세자가 4월 26일에 갑자기 사망하자 급하게 귀국한 것이다.

그는 1645년 9월 27일, 효종은 27세의 나이로 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왕위에 오르며 그간 원한을 품었던 청나라에 설욕을 꿈꾸게 된다.

효종은 북벌을 하기 위해 군사력 증강을 꾀했다. 한때 효종으로 인해 유배를 당했던 김자점이 청나라에 효종의 북벌정책을 밀고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를 잘 넘어가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과 무관을 우대하는 등용 정책을 펼치는 등 군사훈련 강화에 힘을 쏟았다.

1654년에는 한강변에서 1만 3000명의 병사가 펼치는 대대적인 관병식을 거행하여 군세를 뽐내기도 했는데 이때 제주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에게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여 시험하기도 했다.

이렇게 군사력을 키우는 효종이었지만 막상 들고 일어나려니 청나라의 기세가 엄청나 엄두를 내지 못 했다. 거기에 1654년 러시아·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가 원군을 요청하여 하릴 없이 나선정벌에 나서야 했다.

효종의 북벌정책은 즉위 8년째에 위기를 맞이했다. 송시열을 주도로 하는 사대부들이 백성들의 생활고를 거론하며 비난했다. 효종은 송시열 등을 중용하여 사대부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지만 이들의 북벌정책은 명분만 있을 뿐 정책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리고 1659년 5월 4일, 효종이 낙마하여 엉덩이에 생긴 종기로 인해 급서하자 이런 북벌정책은 모두 소멸하게 된다.

효종은 북벌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지만 결국 국가적인 열세를 이겨내지 못했고 내부의 사대부들도 설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충청도와 전라도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공납의 폐단을 없애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도 큰 업적을 남긴 왕이다.

비록 10년이라는 짧은 왕위를 영위하여 제대로 된 복수를 해 보지 못한 불운한 왕이었지만, 조선이라는 국가의 자존심과 청이라는 대국에도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는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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