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pro]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얻기는 했지만 사실 유능한 왕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정책을 구사하여 큰 마찰이 없이 지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우선 광해군을 쫓아낼 때의 명분이 왕위를 위해 어미를 폐위하고 형제를 죽인 것과 사대를 해야 하는 명을 밀어내고 후금과 친하게 지낸 것이었다.

 

이미 명은 저물어가는 해였고 금은 떠오르는 해였지만 인조는 이런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향명배금(명을 향하고 금을 배척한다)’ 정책을 표방한다.

그러자 명나라를 공격하려던 후금에게 조선은 배후를 위협하는 국가로 급부상하여 먼저 처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에 명과의 전쟁으로 인해 심한 물자부족을 느끼는 후금은 조선과의 교역이 필요했었는데 반란을 일으키고 후금으로 달아났던 이괄 등이 친금정책을 썼던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면서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조선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다.

이에 후금 태종이 조선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 전쟁이 바로 정묘호란(1627)이다.

1627년 1월 후금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항복한 조선인 강홍립 등을 앞세워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진군하여 안주와 평산, 평양과 황주를 거침없이 장악한다.

조선은 이에 크게 놀라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게 된다.

황주까지 다다른 후금군은 1627년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인조가 있는 강화도로 보내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된다.

그리고 양국은 3월 3일 정묘조약을 맺게 되는데 후금의 병사를 물리는 것과 양국이 형제국이 되는 것. 후금과 화약을 맺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왕자를 대신하여 종실인 원창군을 인질로 보냈고 후금군도 철수하면서 정묘호란은 종결이 된다.

후금이 명나라 정복을 주력으로 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선의 도발을 차단하고자 벌렸던 정묘호란. 현실을 무시하고 명분과 의리만 중시하던 조선이 호되게 혼이 났던 사건이었지만 조선은 그 지경이 돼서도 사태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