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의 가장 큰 위기였던 임진왜란. 설탕 벽처럼 무너지던 조선의 방어벽은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의 의주로의 몽진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왜군에게 단 한 차례도 지지 않은 조선의 맹장이 있었으니 바로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기묘사화로 참변을 당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관직의 뜻을 버려 평민의 삶을 택한 아버지 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2세라는 늦은 나이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에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지만 말이 넘어져 낙마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자신의 다리를 부목을 대고 활을 쏘는 열정을 보였지만 결국 낙방하게 된다.

4년 후 그는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부임했는데, 발포수군만호시절 군기경차관인 서익이라는 자가 이순신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는 허위신고를 하여 이순신은 처음으로 파직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곧 허위임이 밝혀지고 다시 복직을 하게 된다.

1586년에는 오랑캐들의 침범이 있자 함경도 조산보병마만호(造山堡兵馬萬戶)로 임명이 되었는데 녹둔도의 방비를 위해 방비를 위해 증병을 요청했지만 병사 이일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결국 오랑캐에게 패해 그 죄로 하옥 당한다.

그 후 여러 근무지를 오가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현재의 여수인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부임하게 된다. 그는 부임하게 되면서부터 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였고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건조에 착수한다.

1592년 4월 13일 도합 20만에 이르는 왜가 쳐들어 온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다.

왜군의 거침없는 진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조선의 장군 중에는 배와 화포와 군기를 바다에 미리 침몰시키고 도망치는 자도 있었다.

조선의 심각한 위기임을 깨달은 이순신은 4차례의 출동을 하게 된다.

1차 출동(1952.05.04.~08) 이순신은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전투를 벌여 적선 40여 척을 파괴하는 승리를 거둔다.

2차 출동(1952.05.29.~06.10) 이순신은 서천해전에서 거북선의 위용을 처음으로 보이며 13척의 적선을 격파한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적탄을 맞았으나 개의치 않고 군을 감독하고 격려하였다. 당포 해전(06.05)에서는 통영에 정박적인 적선 21척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뒀고 당항포해전에서는 고성에서 이억기, 원균과 함께 공격하여 적선을 26척을 격파했다. 또한 거제도 율포에서 벌어진 율포 해전에서는 7척의 적선을 격파한다.

3차 출동(1952.07.06.~13)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90여척을 이끌고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삼도 수군 연합부대를 구성하게 된다. 7월 8일 한산도에서 이순신은 와카자키가 이끄는 대군을 맞서 싸웠는데, 견내량에서 한산도로 적군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통해 73척 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불태워 버리는 대승을 거뒀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라는 자리에 올랐다. 7월 10일에는 안골포에 정박중인 구키의 왜국을 격파하여 해상에서의 우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안골포해전).

4차 출동 (1952.08.24.~09.02) 이순신은 왜군이 본거지로 삼고 있던 부산포를 기습하여 적선 470여 척 가운데 100여 척을 분파시켜 버린다. 이에 왜군은 해전에서는 더 이상 싸우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하여 육병(陸兵)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왜군은 바다에서의 전투는 곧 자신들의 패배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왜군은 그렇게 당하고서도 또 한 번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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