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인턴]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성종은 훈구파들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영남의 김종직을 데려왔다. 김종직이 중앙에 진출하자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이들도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사림이다.

사림은 언관직인 3사를 장악하여 훈구파의 비리 등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개국공신들이 많은 훈구파에게 사림은 개국을 반대하며 약 100년 간 국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회주의자였다. 반면 사림에게 훈구파는 성리학의 명분을 멀리하고 백성을 착취하는 무뢰배들이었다.

 

이렇게 훈구파와 사림은 서로 반목하고 감정적인 골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힘이 있는 훈구파가 폭발하여 사림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버렸는데 이를 사화(사림의 화)라고 한다.

사림을 등용하고 옹호했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파는 김일손이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빌미로 삼았다. 훈구파인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이라며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엄벌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이에 김종직은 이미 사망한 후라 무덤에서 꺼내어져 부관참시를 당했고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 30여 명이 참형을 당하거나 귀양을 보내졌다. 이 사화는 1498년 무오년에 발생하여 ‘무오사화’라고 불린다.

연산군은 투기가 심하여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성종의 윤씨의 아들이다. 윤씨가 사약을 받았을 때에는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정숙의,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합심을 한 영향도 컸다. 연산군은 임금이 된 후에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왕의 측근이자 훈구 세력인 임사홍이 반대파에 타격을 주기 위해 연산군에게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일러바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복수심에 불타올랐고 엄숙의, 정숙의를 비롯하여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또한 언관에서 근무하면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잘못을 따져 결국 사약을 마시게 한 사림 세력들에게 그 화살이 돌아갔다. 이 사화로 훈구파도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사림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1504년,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이 사화는 갑자년에 발생하여 갑자사화로 불린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포악성은 더욱 극심해 졌으며 이를 더 볼 수 없었던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쫓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인 중종을 왕으로 추대했다.(1506년 중종반정)

중종은 연산군을 반면교사 삼아 폭정을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조광조라는 인물을 발탁하게 된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제자였다. 그는 이상적인 유교주의자답게 성리학적 이상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처음에는 총애했던 중종마저 조광조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훈구파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의 사건을 꾸며 중종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따라 조광조 등이 사약을 받고 귀양을 가는 세 번째 사화 기묘사화(1519)가 발생했다.

을사사화(1545)는 이전의 사화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기묘사화 이후 권력은 다시 훈구파에게로 돌아갔다. 중종이 죽자 왕위 계승을 높고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이 집안싸움을 벌였다. 결국 윤임이 지지했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윤임은 윤원형 파에게 엄청난 홀대를 했다.

그런데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죽어 뒤를 이어 윤원형이 지지했던 명종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전세는 뒤집어져서 윤원형 일파는 윤임일파를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 정계에 남아있던 사림 세력들은 또다시 피해를 입게 된다.

이처럼 사림은 4차례의 사화를 통해 큰 피해를 입고 세력이 극히 약해졌다. 하지만 서원과 향약으로 그 명맥을 이었으며 선조에 이르러 다시 중앙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사화에서 생겨난 당파의 분파를 토대로 붕당을 형성하여 또다시 다투게 된다.

훈구파의 기득권을 위한 욕심과 사림의 입바른 소리로 인해 발생했던 피비린내 나는 사화. 네 차례의 사화로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갔지만 결국 사림은 끝까지 살아남는 저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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