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인턴]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사화(士禍)란 조선시대에 신하와 선비들이 서로 파를 나누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으로 사림의 화를 줄인 말이다. 서로 죽고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등 권력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유로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 중심인 훈구파와 사림파는 어떤 사람들일까?

 

훈구는 예로부터 훈공이 있는 집안 또는 신하를 뜻하는 정치 세력으로 세종의 집현전과 세조를 개인적으로 충성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계유정난(1453: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난)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세력이다. 이들은 정치적 지배권을 더욱 강화하려 하였고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맺어 지위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들은 면세의 혜택이 이는 대규모 공신전의 하사와 서해안의 간척 사업을 통해 대규모 농장의 소유로 대지주층으로 성장하였으며 대외 무역과 공물의 방납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독점하여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폐단을 야기했다.

사림은 사대부지림(士大夫之林)의 준 말로 고려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조선 초기에는 양반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하지만 16세기부터는 훈구파를 제지하는 반대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림은 고려 말, 조선 왕조를 새롭게 시작했던 것에 반대했던 온건파 사대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왕조가 개창한 이후 재야의 유향품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들은 중소지주정도의 기반을 가지며 지방의 세력으로 자리매김 하였고 성리학의 명분론적 원칙에 철저하여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하였다. 이들은 향촌 자치와 힘에 의한 패도 정치보다는 덕치와 인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지향했다.

재야에 묻혀있던 이들은 성종 초, 너무나도 막강해지는 훈구 대신들을 견제할 목적에서 김종직을 비롯한 영남 출신의 사람들을 중앙 관직에 앉히면서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사림은 주로 3사를 비롯한 언론 관직을 통해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는 언론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훈구파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사림은 조선이 건국 되면서 한 번 역사의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던 파라고 할 수 있다. 정몽주와 이색, 길재의 계보를 잇는 이들은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여 부국 강병을 중시하는 훈구파와 자주 마찰이 생겼다.

새롭게 힘을 얻은 사림파는 과연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훈구파와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까?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