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디자인 이정선 인턴]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조선시대 백성들의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 양민(농민)들이었지만 주인공은 양반들이었다. 당연히 양반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과거를 통한 양인들의 신분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양반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교육을 하여 양인들의 신분 상승을 막아야 했다. 때문에 모든 교육들이 양반 자제를 중심으로 하여 마련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중시하고 기술을 천시하였다. 때문에 문신 양성의 유학교육에만 치중하였고 무신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시설은 따로 없었다. 또한 고려시대에 비해서는 교육 기관이 늘어났고 그만큼 교육에 대한 기회가 확대되었다. 특히 학생에게 역을 면제함으로써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일반적으로 농민의 자제들은 학업과 농사일을 겸하였다.

조선은 중앙 교육 기관으로는 중등 교육기관으로 4부 학당과 고등 교육 기관으로 성균관이 있었다. 지방에는 군현 단위의 중등 교육 기관으로 향교가 있어 각 군현의 인구에 비례해 정원을 책정했다.

조선 시대에는 가정이나 초등 교육 기관인 서당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후 중등 교육기관에 진학하여 소과에 응시했다. 소과를 합격하게 되면 진사 또는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게 된다. 이렇게 성균관에 들어간 유생이나 이에 동등한 자격을 갖추게 되면 비로소 문과(대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과거는 소과를 거쳐 대과에 이르는 과정을 갖는데 소과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한 예비 시험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문과)를 준비하거나 하급 관리가 되기도 했다. 소과는 초시(한성시, 향시)에서 1400명을 선발하고 예조에서 시행하는 복시에서 생원 진사를 각각 100명씩 모두 200명을 선발했다. 여기서 생원이란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높은 사람을 말하고 진사란 한문학적 재능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소과에 합격하면 백패를 받는다.

소과를 통과해 생원과 진사가 되면 문과를 볼 수 있게 되는데 문과는 대과 또는 동당시라고 불렸다. 문과는 성균관에서 원점 300점 이상을 받은 생원과 진사가 응시했지만 일반 생원, 진사와 하급 관리도 응시할 수 있었다. 문과는 초시-복시-전시 단계로 이어져 있으며 급제르 f하면 홍패를 수여받았다. 급제자 둥 1등부터 3등 까지는 갑과라 하고 4등부터 10등까지는 을과, 11등부터 33등 까지는 병과로 나뉘는데 갑과 중 1등은 장원(壯元)이라고 불렀으며 종 6품을,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라 하여 각각 정 7품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을과는 정 8품, 병과는 정 9품의 품계를 받았다.

무과는 고급 무관 시험으로 조선 태종 때부터 시행되었는데 소과를 보지 않고 초시-복시-전시로 이루어져 있었고 급제자에게는 역시 홍패를 수여했으며 총 28명을 뽑았다. 1등부터 3등인 갑과에는 종 7품을, 을과 5인에게는 종8품을, 병과 20인은 종 9품의 품계를 주었다. 과목은 무예와 병서 그리고 유교 경전까지도 시험과목으로 하였다.

잡과는 기술관의 등용 고시로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등의 4종류가 있었는데 예조와 해당 관청에서 주관했고 초시와 복시로만 이어져 있었으며 합격자에게는 백패가 수여됐다.

문과는 국가 관료가 될 자격을 박탈당한 범죄자, 국가 재정을 축낸 자(탐관오리)의 아들, 재가녀, 실행녀의 아들, 서얼 자손, 정3품 통정대부 당산관 이상, 양인 중 수성군, 수묘군 등과 같은 신량역천(양인이면서 천한 일을 하는 부류)를 제외하고 법적으로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과는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도 응시의 문이 열려 있었다.

식년시로서 3년마다 실시되었던 조선시대의 신분상승의 기회 과거와 과거를 위한 교육시스템. 누구나 볼 수 있는 시험은 아니었지만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한 가닥의 희망이 있었던 조선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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