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인 이방원은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스스로 세자에 올라 적장자가 없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아(1400) 태종이 되었다.

태종은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려 했을 때는 자신의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엄청난 반대를 했지만 막상 자신이 왕위에 오르니 사병의 존재가 위협이 되었다.

태종은 자신이 원래부터 꿈꾸던 강력한 왕권에 의한 국가를 위해 국가의 행정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태종은 6조 중심의 행정체계를 완성하였고 오늘날의 지방제도에도 근간이 되는 8도 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국가 운영의 필수인 인구나 군적 파악을 위한 호적법을 정비하는 등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만들기는 했지만 지만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자신이 국가 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조리 숙청하였다.

사병을 가장 많이 거느리고 있어 태종의 사병혁파를 반대했던 이거이를 거리낌없이 숙청했으며 세자를 끼고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원경황후 민씨의 4형제를 제거하는 등 비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태종은 1405년 송도(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하여 창덕궁·덕수궁·경회루·행랑·청계천을 조성하였고 강력한 왕권 구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여 안정적인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했다.

왕으로서의 성공적인 업적을 이룬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 충녕대군에게 물려주게 된다.

원래는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무절제와 방탕한 생활을 밥 먹듯이 하고 궁중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점을 들어 6조 등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폐위를 요청하였고,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양녕대군의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군권에 참여했다. 또한 병선 227척, 군사 1만7000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여 세종의 왕권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나 왕위에 오른 후의 피의 숙청은 매우 비정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태종의 노력에 의한 문물제도 정비와 중앙집권은 그의 아들인 세종의 태평성대의 토대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태종은 태조에게는 왕위를 위해 형제를 죽인 나쁜 아들이었지만, 후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좋은 아버지이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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