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와 왕자들의 사병의 힘을 합쳐 고려 500년의 역사를 끝내고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정도전의 힘은 날로 강성해져 갔고 왕위를 선정하는 것 까지 관여를 하게 된다.

태조에게는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와의 사이에 여섯 형제가 있었고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와는 두 명의 아들을 두어 총 여덞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태조는 무인 출신인 자신과는 달리 어린 나이에도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는 여덞 째 아들 방석을 총애했고 정도전 역시 방석을 세자자리에 앉히는 것을 건의해 다른 나이 많은 왕자들을 제치고 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에 첫째 부인 소생의 왕자들은 큰 반발을 했는데 특히 정몽주를 제거하고 고려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는 등 조선 건국에 공이 가장 많았던 방원은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거기에 정도전이 주창하는 임금과 신하가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는 왕자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왕자들이 가진 사병을 국가가 회수하는 사병혁파를 시행하려고 하였고, 사병이 권력의 핵심이었던 왕자들의 반발은 한계점에 이르렀다.

결국 이방원은 1398년(태조 7)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을 비롯하여 남은 등 자신이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 혹은 정도전의 난이다.

1차 왕자의 난이 성공을 하자 하륜 등의 이방원의 심복들은 바로 이방원을 세자에 책봉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세자에 오르기에는 정치적으로 입장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둘째인 방과를 세자로 올렸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가 곧 2대 임금인 정종이다.

그런데 정종은 자식이 없었다. 이에 세자의 자리를 놓고 왕자들 간에 또다시 미묘한 분위기가 생성되기 시작했는데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의 조전절제사로 전공을 세웠으나 보상이 낮음을 불평하여 방원의 미움을 사 유배되었던 방작이 앙심을 품어 방간을 충동질 했다.

이에 1400년 1월 방원과 방간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했고 이는 사병의 수가 많았던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으며 이를 제2차 왕자의 난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대적할 사람이 없어진 방원은 스스로 세자에 올랐고 1400년(정종 2)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건네받아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太宗)이 되었다.

건국 초기의 왕위 다툼은 으레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왕위를 위해 형제들끼리 칼부림을 일으킨 부분은 실로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기업들의 경영권 다툼에서도 비슷하게 보이니 실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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