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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최근 TV에서 조선건국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정도전.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 중 하나인 정도전은 어떤 인물이길래 최근 이렇게 각광받는 것일까?

정도전은 1342년 생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文臣)이었다.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다.

 

정도전이 호를 삼봉으로 한 것은 충북 단양의 도담삼봉이라는 3개의 기암의 풍경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1370년에는 성균관박사로 정몽주와 함께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가르쳤다.

우왕이 즉위하면서 정도전에게는 시련의 시기가 왔다. 정도전과는 정치적인 성향이 반대인 이인임, 경복흥 등이 권력을 잡으면서 친원배명(원과 친하게 지내고 명을 배척한다)정책을 주도했다.

이 정책에 반대하고 있던 정도전은 결국 원나라의 사신을 마중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으로 유배됐다.

2년을 유배생활을 하고 풀려났다가 후학을 가르치는 등 유랑생활을 하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정도전과는 가장 큰 꿈을 공유하는 이성계(李成桂)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1384년에는 정몽주의 서장관(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남양부사를 거쳐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중심이 되자 정도전 역시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당시 신진사대부는 고려를 이어가려는 온건파와 새로운 왕조를 만들자는 급진파가 양립하고 있었는데 온건파의 중심이었던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온건파는 사실상 궤멸했다.

잠시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감옥에 투옥됐던 정도전은 정몽주가 사망하자 유배에서 풀렸고 조준, 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1392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한 후 1등 공신으로 올라 큰 권력을 얻게 된다.

정도전은 개국한 조선에서 엄청난 일들을 하게 되는데, 한양 천도 과정에서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각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을 짓는데도 공헌했다.

정도전은 또한 조선의 통치규범을 제시한 ‘조선경국전’을 제작해 태조에게 올렸다. 이는 후일 조선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중국의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제시했다.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그가 주장했던 요동 정벌로 인해 명나라와의 관계가 껄끄럽기도 했다. 그는 중국 이외의 민족도 중원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명나라는 이런 정도전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고 1394년 발생한 ‘표전문사건(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의 글귀가 예의에 어긋난다며 명나라가 트집을 잡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 표전문을 작성한 사람이 정도전이라는 얘기가 나왔고 이에 기회를 잡은 명은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라는 압박을 넣었지만 조선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정도전은 명나라를 갈 이유가 없었다.

결국 표전문을 작성한 사람을 정총과 김약항이라고 결론짓고 김약항만이 명나라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는 이에 지속적으로 정도전을 보내라며 압박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진법을 훈련하며 요동을 정벌하는 힘을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왕자들의 사병을 내 놓으라는 요구를 했고 이에 왕자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정도전은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했는데, 조선건국에 공이 많았던 다른 왕자들을 무시하고 진행한 일이었기 때문에 왕자들의 분노는 엄청나게 커졌다.

결국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방원의 분노로 인해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두 왕을 섬긴 간신으로 평가되며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가 되어서야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관직이 회복되었다.

정도전은 왕과 신화의 조화를 꾀했지만 이방원은 전제적인 왕권을 꾀했다. 왕자의 난이 세자 책봉을 마음대로 한 이유도 있었지만 이방원과 정도전이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이 달랐다는데도 그 영향이 크다.

비록 조선조 내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그였지만 조선말, 그리고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재평가 되는 그는 조선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진 인물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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