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시선뉴스 이호기자] 고려 말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은 우왕을 옹립하여 친 원나라 세력을 키웠다.

우왕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의 토지 탈점등의 횡포와 맞물려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백성들은 더욱 피폐해 졌고 왜구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 등의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게 된다.

정치적 혼란과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와중, 최영은 이성계와 힘을 합쳐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등을 제거했다. 이들은 이 일파들을 모두 숙청하고 그들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를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최영의 신임을 받아 지위가 급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최영의 신임을 받았던 이성계는 명을 치러 가는 도중 돌아오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게 되고(키워드 한국사 위화도 회군 참고)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최영을 비롯한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신진 사대부와 함께 정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신진사대부와 이성계 등 신흥 무장들은 새로운 협력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들도 고려를 존속하자는 온건파와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급진파로 나뉘게 되는데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이 정통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비왕설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지시켰다.

또한 사전개혁을 완수하여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제정했다. 이로 인해 권문세족의 경제적인 기반은 완전히 몰수되게 된다.

고려 왕조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온건파의 대들보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소식에 문병을 다녀오던 중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당한다.(1392년 4월)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온건파의 지주인 정몽주가 사망하자 이색을 비롯한 고려의 옛 중신들은 모두 귀양에 보내졌고 공민왕비인 정비의 교지와 도평의사사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공양왕을 폐하여 고려 왕조는 완전히 끝이 나게 된다.

그리고 감록국사였던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고려의 새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는 아직 고려를 국호로 사용하고 있었다.

태조는 태조 2년인 1393년 단군 조선의 역사의 유구성과 천손의 후예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기자조선에서 도덕 문명의 뿌리를 찾아 이를 계승, 발전시킨다는 역사 계승의식을 반영하여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다. 또한 1394년에는 풍수지리사상의 영향을 받아 행정과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조선은 그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단군 조선의 뿌리를 잇는 조선왕조 500년. 그 시작이 조선 건국과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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