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시선뉴스 이호기자] 고려는 지방 호족 세력과 6두품의 힘을 받고 건국이 되었다. 때문에 이들은 개국공신의 모습을 보이며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처음 힘을 갖게 된 사람들은 그 권력을 더욱 키우기 위해 왕실이나 자신의 위치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혼인 등으로 관계를 맺게 되고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며 전시과와 공음전을 받고 일반 백성들에게 고리대 및 개간을 통해 재산을 축적했다. 이렇게 여러 세대를 거쳐서 높은 관리가 나오게 된 가문을 문벌귀족이라 하며 이들이 고려 초창기의 귀족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지배세력은 고려의 국내, 외 사정에 따라서 변천하게 되는데, 고려 초에는 문벌귀족이 득세를 하다 업신여김을 받던 무신들의 반란으로 무신 집권기가 도래하였고 그 시기에는 무신들이 지배를 하였다. 그러다 원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원 간섭기 시기가 되었을 때는 원나라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원나라에 충성을 바친 이들이 성장한 권문세족이 득세를 했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는 신진사대부가 고려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고려는 신분이 세습은 되지만 계층간 이동이 가능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과거시험을 통해 중류층이 상류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원 간섭기에는 특히 원나라 말을 할 수 있거나 원나라에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직이 주어지는 등 신분 간 이동이 많았다.

그 중 상류층으로 가장 활발한 이동이 가능했던 계층이 바로 중류층이다. 중류층은 지배기구의 말단 관리격의 실무층으로 중앙 관청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서리, 궁궐의 실무를 담당하는 남반, 조세, 공납 징수 및 역 징발 등의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향리, 하급 장교나 군반(직업 군인), 기술관(법률, 회계, 지리), 교통로의 역을 관리하는 역리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직역 세습으로 집안 대대로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었으며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아 생활했다. 특히 이들 중 향리는 지방에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이 강력했기 때문에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격 위치를 가졌고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가장 많이 발전하기도 했으며 고려 후기에는 신진 사대부로의 성장도 많았었다.

중간층 밑에는 양민이 있었다. 양민 중 농민은 양민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조세를 납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땅을 경작하거나 남의 땅을 소작했으며 조세, 공납, 역의 의무를 지는 등 국가 재정의 가장 큰 역할을 한 계층이다. 고려시대에서는 농민까지는 과거시험을 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향리와 비교했을 때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백정이 농민과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천민에 속하지는 않았다.

농민 밑에는 상인, 수공업자와 향, 부곡, 소의 주민이 있었는데 이들은 양민에 속했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향, 소, 부곡의 주민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으며 거주지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양민 및 최하층에는 천민이 있었는데 고려시대의 천민은 대부분 노비로 국가노비인 공노비와 개인 노비인 사노비가 있었다.

공노비는 궁중 및 관청에 소속되어 잡역 등을 하고 급료를 받으면 입역노비, 농업에 종사하며 세를 부담하면 외거노비라 했다. 사노비는 주인과 함께 살면 솔거노비, 주인과 따로 살면서 세를 주인에게 납부하면 외거노비라고 했는데, 주로 주인에게 많은 신뢰와 예쁨을 받는 노비가 이런 특혜를 가질 수 있었다. 노비들은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 상속, 증여가 가능했고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고려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농민까지는 계층의 이동이 허용되어 부분적으로 개방이 된 사회였다. 하지만 이때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상류를 바라볼 수 있는 엄두가 나는 시대였으므로 현대의 ‘금수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씁쓸하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