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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기자] 호족의 많은 도움으로 세워지게 된 고려. 광종의 호족 숙청 이후 지방호족과 새로운 과거를 통한 세력이 성종 이후 기반이 확립되면서 하나의 사회귀족 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문벌귀족은 이런 호족과 개국공신,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화된 계열,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로 구성된 귀족으로 가문을 중시한 신분이었다. 문벌귀족에게는 두 가지의 강력한 특권이 있었는데, 바로 음서제도와 공음전이었다.

이 두 제도는 문벌귀족에게 매우 강력한 권력을 부여하는 제도로 음서제도는 5품 이상의 고위관직의 자손이 과거를 보지 않고서도 중앙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제도이며 공음전은 공신전 형태였건 것을 5품 이상에게 지급되는 세습전(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토지)으로 정착시킨 제도다.

 

음서제도는 고려가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기는 했지만 중앙의 요직에는 귀족들의 자제만이 등용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실질적인 차별 정책이었다. 또한 공음전은 귀족들의 부를 지속적으로 확장시켜 주는 것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문벌귀족은 또한 왕족과 혼인함으로써 이런 특권들을 영구히 누리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처음에는 개방적이었던 고려의 상위 사회는 과거 신라의 골품제도처럼 폐쇄적이게 되어갔다.

고려 왕조가 건국한 이래 광종 등의 노력에 의해 왕권이 많이 강화되었지만 성종의 다음 왕인 목종 강조에게 살해당하고 현종이 즉위함으로써 절대적이지는 못한 것을 보여줬다.

고려는 당시 대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어 송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였고, 북방 민족인 거란이 세운 요나라는 강성해지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던 거란은 무시했었다.

이에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하였지만(1차) 서희(徐熙)의 외교 수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강동 6주(江東六州)를 확보했다.

이때 고려에서는 형식적으로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고 송과의 관계를 단교한다고 했지만 계속적으로 송과는 친분을 유지하고 거란을 무시하는 태도가 계속되자 거란은 현종이 즉위한 것을 빌미삼아 1010년 2차 침입을 하게 되었다. 거란의 성종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었다. 이에 현종은 멀리 전라도 나주(羅州)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에 곧 수습되어 요군은 하릴없이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가게 되었다.

1018년 거란은 소배압을 필두로 고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3차)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으면서도 개경 부근까지 무리를 하며 내려왔다가 포기하고 본국으로 패퇴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대패하게 되었다(귀주대첩). 거란은 이 침략으로 10만의 대군을 끌고 왔었지만 고작 수 천 명만이 생환하는 수치를 맛보아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국방 강화에 더욱 노력하였고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는 나성을 북쪽 국경에는 천리장성을 쌓아 외세의 침입을 막았고 그 뒤 몇 차례의 침략행위가 있었지만 고려는 이를 다 이겨냈고 결국 고려와 거란은 화평을 되찾아 비교적 평온한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고려의 중기는 새로운 귀족신분인 문벌귀족이 새롭게 권력을 세우고 폐쇄화 되어 가는 과정을 가지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이며 안정을 찾았던 시기다. 하지만 지나치게 폐쇄적인 골품제도가 신라를 멸망으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문벌귀족 역시 그 뒤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려는 신라의 뒤를 잇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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