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시선뉴스 이호기자] 태조 왕건이라고 누가 떠오르는가? 대부분의 3040세대 이상은 배우 ‘최수종’을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궁예를 물리치고 고려의 첫 번째 왕이 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왕건은 877년에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沙湌) 왕융(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는 신라가 진골 귀족들의 왕위 다툼과 백성의 수탈로 인해 망국에 들어설 때여서 지방에서는 진골귀족과 대비되는 지방 귀족인 호족들이 중앙에 바칠 세금을 착복하여 중앙으로부터 독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 한 가문이 왕건의 가문이었다.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왕건의 가문은 송악에서 가장 큰 권세를 가졌으며 예성강 일대에서 강화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튼튼한 세력 기반을 구축했다.

궁예는 이런 왕씨 가문과 손을 잡고 그 힘을 바탕으로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궁예는 융을 금성 태수로 삼고 송악에 도읍한 다음, 갓 스물이던 왕건에게는 송악산 기슭의 발어참성 성주의 직위를 주었다.

왕건은 궁예의 장군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무역을 주로 하여 필수적으로 키워야 했던 수군으로 한강 유역과 서해안, 멀리 지금의 경상남도까지 공략하여 기세를 떨쳤다.

913년에는 전남 해안인 덕진포에서 후백제 왕인 견훤의 수군과 전투를 했는데, 이 때 왕건은 화공으로 후백제 수군을 격파하여 견훤은 간신히 목숨만 구할 수 있었다. 이 공으로 인해 왕건은 궁예의 신임을 더욱 크게 얻게 되어 후고구려의 이인자인 시중의 지위에 올랐다.

후 고구려는 천도하여(수도를 옮겨) 개경에서 철원으로 옮겨졌다. 이 무렵 궁예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접고 스스로를 신라 왕실의 후예라 하면서 자신이 타락한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의 미륵이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이 커진 호족과 장수들을 반역죄로 처형하기 시작했는데 왕건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궁예가 “내 관심법으로 보니 네가 반역을 꾀했다”라고 궁예가 말하자 “그렇습니다. 제가 감히 역모를 꾸몄습니다.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보고 미륵을 알아보는 정직한 사람이라며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겨우 화는 면했지만 궁예에게 숙청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므로 왕건과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박술희 등의 호족들은 918년에 궁예를 내쫓게 된다.

그 후 왕건은 후 백제와는 대립을, 망해가는 신라에게는 구원의 손길을 주면서 포섭을 하기 시작해 결국 신라의 경순왕은 930년에 고려에 항복해 흡수가 되었다. 후백제도 견훤의 아들인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935년) 견훤이 유폐되었는데 가까스로 탈출해 고려에 망명을 하게 된다. 이에 왕건은 견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도 받아들이며 936년 견훤과 함께 후백제 신검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재통일을 완수하게 된다.

왕건은 고구려의 적통을 잇는다는 뜻으로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였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왕건은 민족의 융합과 안정된 왕권을 위해 힘이 있는 호족들을 자신의 성씨인 왕씨 성을 내려주고 혼인 관계를 맺는 등 적극적으로 포섭하는데 노력했다. 자신의 측근이 된 호족들을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지방을 통치하게 했으며 평양(서경)을 필두로 고구려의 영토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다.

왕건은 또한 백성을 다독이고 쉬게 하는 정치를 펼쳤다. 고구려의 진대법과 비슷한 흑창(黑倉)을 설치해 빈민을 구제했고 조세를 크게 낮췄다. 그리고 궁궐이나 의복을 검소하게 궁궐이나 의복 등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모범을 보였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왕건은 어지러운 후삼국 시대를 비교적 평화적으로 통일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시기가 잘 맞아서인지 국운이 그렇게 되어서인지 왕건이 흡수를 한 나라들은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는 모양이 되었다.

당나라도 넘보기 힘들었던 강맹한 고구려의 직통임을 천명한 고려. 고려의 기상은 바로 왕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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