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26일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았던 불세출의 팝 디바 휘트니 휴스턴의 딸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이 휘트니 휴스턴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신과 딸까지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휘트니 휴스턴.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 휘트니 휴스턴 (출처/영화 보디가드)

휘트니 휴스턴은 미국의 뉴저지주에서 1963년 8월 9일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소울 가스펠 가수인 엄마 씨씨 휴스턴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고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14살이 되던 1977년에는 미국의 R&B DISCO 그룹인 ‘The Michael Zager Band’의 ‘Life's A Party’에 백업 가수로 참여하며 음반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978년에는 샤카 칸의 히트곡인 "I'm Every Woman"에 백그라운드 보컬로 참여했고 롤스와 저메인 잭슨의 앨범에도 백보컬로 참여하게 된다.

80년대 초반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노래하던 중 한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모델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이후 팝 밴드 ‘Material’의 메모리스’Memories’(1982)를 리메이크 하여 극찬을 받기도 했다. 또한 미국 싱어송 라이터 ‘Paul Jabara’의 ‘Eternal Love’(1983)에 보컬로 참여해 커리어를 쌓았으며 미국 시트콤 등에 출연하면서 배우 활동도 같이 하였다.

1985년 2월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 매서, 카시프, 저메인 잭슨, 나라다 마이클 월든과 같이 기라성 같은 프로듀서들이 참여한 데뷔앨범 ‘Whitney Houston’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발표한 싱글 ‘Saving All My Love For You’(1985)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 Greastest Love of All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출처/Greastest Love of All M/V)

그리고 앨범에서 발표된 싱글들의 대성공으로 휘트니 휴스턴은 그래미상을 수상하게 되고 첫 번째 앨범 Whitney Houston은 발매된 지 거의 1년 만에 빌보드 앨범차트(Billboard 200) 1위에 오른 이후 14주간 1위를 지켰다. 또한 지금도 불후의 명곡으로 불리는 앨범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싱글이었던 ‘Greatest Love of All’은 5월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라 3주간 정상을 지키면서 휴스턴은 데뷔앨범에서 세 곡(‘How Will I Know’포함)의 1위곡을 배출한 첫 번째 여성가수로 기록됐다.

휘트니 휴스턴은 그 후에도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1987), ‘Didn't We Almost Have It All’(1987) 등의 곡이 연속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미국과 영국을 포함, 네덜란드, 뉴질랜드, 독일, 스웨덴, 스위스,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리아,[60]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각국 앨범차트에서 모조리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렇게 주가를 올리고 있던 휘트니 휴스턴은 1990년대 배우를 함께 병행했다. 1992년 믹 잭슨 감독의 영화 ‘보디가드’에서 주연을 맡으며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케빈 코스트너가 상대역을 맡았는데, 당시 흑백 남녀 간의 사랑이 은연 중 금기되었던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휘트니 휴스턴의 스타로서의 이미지는 관객에게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게끔 만들었다. 비록 휘트니 휴스턴의 연기는 혹평을 받긴 했지만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 많은 패러디를 몰고왔던 데뷔작 영화 보디가드(출처/영화 보디가드 포스터)

영화는 미국에서만 1억 2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전 세계적으로는 4억 천만 달러라는 큰 수입을 거두게 된다. 한국에서도 1992년 12월 5일 개봉되어 서울에서만 백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여 당시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으며 각종 패러디들이 티비에서 보일 만큼 큰 이슈가 되었다. 국내 팬들에게도 이 영화로 인해 휘트니 휴스턴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이 영화의 수록곡이었던 ‘I Will Always Love You’는 ‘웬다~이아’로 친숙하게 우리에게 다가왔으며 1992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여 영화는 물론 사운드 트랙까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후에도 많은 영화와 사운드 트랙에 참여하여 휘트니 휴스턴은 미국 최고의 디바로 승승장구하며 1992년에는 미국의 유명 R&B 가수인 바비 브라운과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영원히 디바로 남을 것 같던 휘트니 휴스턴은 2000년대에 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편인 바비브라운의 폭력과 마약으로 인한 불화설과 휘트니 휴스턴 역시 마약에 중독됐다는 소문이 언론에서 다뤄졌고 2002년 발매했던 앨범 ‘Just Whitney...’도 저조한 성과를 기록했다.

결국 2007년 휘트니 휴스턴은 바비 브라운과 이혼했고 2009년에는 오프라윈 프리쇼에 출연하여 그 동안 부인했었던 마약 복용 사실에 대해 시인했다.

하지만 같은 해인 2009년, 앨리샤 키스, 알 켈리, 스위즈 비츠, 에이콘 등의 프로듀서가 참여한 앨범 ‘I Look To You’를 발표하며 ‘I Will Always Love You’앨범 이후 처음으로 다시 빌보드 1위에 오르는 등 재기에 성공하였다.

▲ 휘트니 휴스턴을 애도하는 팬들의 꽃(출처/위키피디아)

그렇게 다시 그녀는 비상하는 듯 했으나 2012년 2월 11일, 비버리 힐튼 호텔 스위트룸에서 욕조에 잠겨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고 결국 약물 복용으로 인한 사망으로 판정을 받게 된다. 그래미 어워드 전야제를 몇 시간 남기지 않고 알려진 비보라 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큰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퍼스트레이디 오브 알앤비(First Lady Of R&B)’, ‘퀸 오브 팝 뮤직(Queen Of Pop Music)’ 등의 칭호를 얻고 총 415번의 수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상을 받은 여성 아티스트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으며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선행도 많이 했던 휘트니 휴스턴. 하지만 그녀 개인적으로 가정불화와 마약 중독, 외로운 죽음과 최근의 딸의 사망소식까지...가장 위대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디바 중 한 명으로 남게 되었다.

국내외의 수 많은 여성 보컬들에 커다란 영감을 준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팝의 여제 휘트니 휴스턴. 그녀의 시원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성량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진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