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기자] 고분은 사전적 의미로 고대에 만들어진 무덤 혹은 옛무덤을 뜻한다. 고분의 역사적 가치는 고분의 양식 및 규모와 함께 매장되어 있는 유물 등을 통해 만들어진 당시의 정치와 사회, 문화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간직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고분은 나라의 특성과 사회의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고구려 시대의 고분은 돌로 만든 돌무지무덤과 입구를 흙으로 만들고 내부는 석실을 만든 굴식 돌방무덤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돌무지무덤은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만들어졌으며 만주의 집안 일대에서 1만 2,000여 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4세기 까지는 단순한 수혈식(시체나 관을 위에서 아래로 안치하는 방식)적석총(돌을 쌓아 만드는 무덤)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5세기에는 횡혈식(방이 있어 시체나 관을 횡으로 높여 놓은 방식) 적석총의 형태로 정교하게 쌓아 올렸다. 대표적인 고분은 광개토태왕릉과 장군총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판 모양의 돌이나 깬 돌을 이용하여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널방 벽의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 봉분을 만든 무덤이다.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초기에는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풍속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으나 후기에는 도교와 음양오행 사상의 영향으로 사신도 같은 그림으로 변하였다. 등용총, 각저총, 쌍영총, 수산리 고분, 덕흥리 고분, 안악 3호분 등이 있다. 굴식 돌방무덤은 입구가 열려있고 눈에 띄어 도굴을 많이 당했다.

백제는 한성 시대에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만들어 졌으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있다.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무덤이다. 웅진(공주) 시대에는 굴식 돌방무덤 또는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바뀌었으며 벽과 천장에 사신도와 같은 그림을 그려넣기도 했다. 굴식 돌방무덤은 공주 송산리 고분이 대표적이며 벽돌무덤은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이 대표적이다. 부여로 천도를 한 시기인 사비시대 때는 소규모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는데, 부여 능산리 고분이 대표적이며 연화문, 비운문, 사신도 등의 벽화가 있다.

신라시대 전기에는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지하에 무덤구덩이를 파고 상자형 덧널을 짠 다음 냇돌로 둥글게 쌓고 다시 봉분을 세운 것으로 옛 신라 지배집단의 매장시설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대체로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고분의 형태상 도굴이 어렵다는 특징이 있어 많은 유물을 남길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천마총, 호우총, 황남총 등의 고분이 있다.

고대의 고분은 그 당시 권력가들의 무덤이었기 때문에 당시 생활 중 가장 선진적이고 고차원적인 유물이 같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도굴꾼들의 횡포로 많은 무덤들이 파해쳐 졌고, 돌무지덧널무덤처럼 무덤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가면서 입구를 찾기 힘든 무덤들만이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도굴꾼 까지 염려해서 제작된 돌무지덧널무덤. 선조들의 지혜가 보이는 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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