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박진아 기자 | '적십자는 어떻게 독립운동에 기여했는가?'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대한적십자사. 고종황제는 대한제국 선포 후 국제기구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1903년 1월 8일 민영찬(閔泳瓚)이 최초의 제네바협약(1864. 8. 22.)에 서명했다. 이후 1905년 칙령 제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이 제정·반포되면서 대한적십자사가 탄생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로부터 국권을 뺏기면서, 적십자 활동은 지속될 수 없었다. 물론, 적십자 활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해 적십자 활동이 이어졌고, 대표적으로 미주(美州)의 ‘대한국민회’와 ‘대한인국민회’가 있다. 

적십자가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면서다.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외적으로 수립을 공포했고, 같은 해 7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이었던 도산 안창호와 시카고 의대를 나온 이희경은 대한적십자회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05년 설립한 대한적십자사는 일제강점기에는 ‘대한적십자회’로 조직되었다가, 해방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후 지금의 ‘대한적십자사’로 자리잡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일제에 희생되었지만, 당시 일본적십자사는 조선인들을 돌보지 않았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 설립, 1919년 5월 국제적십자사연맹이 만들어지며 이곳에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선전하기 위해 대한적십자회를 부활시킨 것이다. 

대한적십자회 부활의 주도 인물 
- 도산 안창호(1878-1938)
1878년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출생 
1895년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 수학 
1897년 독립협회 활동 
1902년 미국 유학 
1907년 신민회 창립 
1913년 흥사단 창립 
1914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 이희경(1894-1947)
1890년 평남 순천, 시카고의대 졸업(1915)
1918년 4월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 
1920년대 대한부인구제회 회원 

또한, 대한적십자회 발기에 참여했던 사람 중에는 세브란스 출신의 의사들이 많았다. 김성겸과 김창세 등이 모두 세브란스 출신이고 안식교 신자였던 둘은 안식교(안식일에 예배를 보는 개신교의 한 분파)에서 설립한 중국홍십자 병원에서 근무했다. 

대한적십자회는 설립 후 결의를 발표했다. 
1. 일본적십자사에 대하여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고 연금(捐金)의 반환을 요구할 것 
2. 국제 연맹회에 호소하여 일본적십자사의 무도하고 무의리한 죄악을 성토하는 동시에 우리의 정의로운 태도와 독립의 자격을 완전히 표시함으로써 세계 적십자 연맹에 가입할 것
3. 신성한 독립전쟁에 있어서 생명과 신체를 희생하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동포를 구호함은 우리 적십자회의 제1의 중요한 의무요 급선무이다. 그런고로 자유정신을 가지고 동포의 참상을 슬퍼하는 우리 민족이여, 성심 협력하여 본회의 목적을 달성할 지어다.
대한민국 원년 8월

대한적십자회는 1919년 11월 15일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고 많은 한인이 희생당함에도 구호와 치료를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의 독립 쟁취는 당연한 의무이다.’라고 외치며 공식 선언한다. 또 1920년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한국독립운동)'라는 영문 화보집을 발간한다.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한국독립운동)'의 내용

1부 : 독립선언서의 영문과 공약 3장, 조선인의 자유를 향한 외침 
2부 : 3.1운동의 시위와 일제의 만행 사진 32장
3부: 대한적십자회 의료진과 참여 인사들, 대한적십자회의 공식 선언(간호원 양성소 사진, 발기문과 발기자 명단, 대한적십자회의 조직)

대한적십자회는 1919년 8월 29일 공식적으로 조직됐고 회원 모집과 조직 확장 활동을 펼친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1919년 8월 이희경(회장)과 김성겸(부회장)이며 이후 안정근과 안창호, 손정도 등이 대한적십자회를 이끌었다.

대한적십자회는 해외 지부를 조직하는 데도 힘쓴다. 미국에는 북미 지부가 만들어졌고, 1920년 하와이 지부 설립, 멕시코 지부, 쿠바, 서간도 안동현, 유하현, 해룡현, 북간도지부 등이 설치된다. 

회원수가 1920년에는 2,300여 명에 이르렀지만, 1920년 말이 되면서 활동도 위축되고 회원 수도 줄어들게 된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독립군 근거지가 와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적십자사연맹에 가입하기 위해 이관용이 노력했으나 한국은 일본에 예속되어 있다는 논리 등으로 가입할 수 없게 된다. 

한편, 대한적십자회는 간호원 양성 활동을 벌인다. 독립운동을 하면 부상병이 생기고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간호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대한적십자회가 단순히 구호 활동을 넘어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활동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곽병규, 정영준, 김창세 등이 교수진으로 활동했고, 김연실, 김원경, 이경신, 이화숙, 오남희, 김순애, 이봉순, 김현숙, 이매리 등 9명이 간호원 양성소를 졸업하게 된다.

이처럼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열망하던 독립전쟁의 시기는 오지 않는다. 1920년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일본과 독립전쟁을 전개하려 했지만 독립운동 자금 모금이 쉽지 않았던 점, 충분한 독립군 양성이 어려웠던 점, 독립군 수가 줄며 독립운동의 기반이 약해진 점 등으로 임시정부가 분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해외에서 활동하던 적십자 회원들은 적십자 정신을 계승하고 구호 활동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독립을 열망한 우리의 한민족들은 독립의 염원을 담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마자 대한적십자회를 부활시켰고, 적십자 운동에 참여해서 군자금을 모았다. 우리는 이들의 활동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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