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툼이 일어나면 희생자가 발생하고, 당사자와 관계없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제주4·3사건’ 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피해자들이 많다. 이에 대해 최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제주4·3사건’과 관련해 군법회의뿐 아니라 일반재판을 통해 형을 선고받은 수형인에 대해서도 직권 재심 청구를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 수천 명은 죄가 없음에도 재판을 통해 내란죄·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다.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극심한 흉년 등으로 악재가 겹친 상황이었다. 또한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지난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3·1절 행사가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였는데 경찰이 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갔고 흥분한 군중들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그러자 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고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다. 

제주도의 민심은 들끓기 시작했고 남로당 제주도당은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에 나섰다. 그리고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이에 미군정은 총파업에 강경대응했고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 사람들로 교체됐다. 1948년 4월 3일 무장 봉기한 남로당과 시위대의 진압 과정 및 한국전쟁 이후의 토벌 작전을 통해 3만여명의 도민이 학살당했다. 

제주4·3사건은 군사정권 동안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며 금기시되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 제정,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진상규명과 정부의 공식 사과, 희생자 보상 등이 이뤄졌다.

국회는 지난해 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을 개정해 1948∼1949년 군사재판에서 형을 받은 수형인에 대해 당사자가 아닌 검찰이 직권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지난해 11월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 수행단’을 설치했다. 그 결과 올해 2월부터 지금까지 군법회의 수형인 340명이 검찰의 직권재심 청구로 다시 법정에 섰고, 이 가운데 250명은 이미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일반재판 수형인은 1,500여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재심을 청구한 경우는 4%에 그쳤다. 개인이 재심 청구인 자격을 인정받기가 까다롭고, 재심 청구에 필요한 자료 확보도 어려우며 소송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반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피해자들도 검찰의 직권재심을 통해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린다. 최근 대검찰청이 ‘제주4·3사건’ 때 군사재판뿐만 아니라 일반법원에서 형을 선고받은 수형인들에 대해서도 직권재심을 청구하기로 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반재판에 나서는 유족들은 청구자격 제한 등 높은 법률 진입 장벽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기에 이번 재심이 유족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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