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 / 디자인 최윤수 수습]

▶ 마거릿 생어(Margaret Sanger)
▶ 출생-사망 / 1883년 9월 14일 ~ 1966년 9월 6일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시민운동가

보건간호사로 활동했던 마거릿 생어는 20세기 여성들이 산아를 조절하고 건강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산아제한 운동을 펼쳤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보건간호사의 길을 걷게 된 마거릿

마거릿 생어는 1879년 뉴욕의 가난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핵 환자였는데, 성하지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무려 18번의 임신을 통해 11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여러 번 유산을 반복하다가 몸이 쇠약해져 48세의 나이에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에 화이트 병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보건간호사가 된 마거릿은 1900년 건축기사인 윌리엄 생어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다. 

빈민가에서 노동자계 이민 여성을 치료한 마거릿 생어

간호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 마거릿 생어는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노동자계 이민 여성들을 치료하며 큰 충격에 빠진다. 마거릿이 살던 곳은 뉴욕시에서도 유럽에서 막 건너온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난한 지역이었는데,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곤경에 처하거나 낙태에 실패해 죽음을 맞이하는 여성들을 직접 보게 된다. 

그곳 여성들 사이에서는 불법적이고 위험한 임신 중절이 흔히 벌어지곤 했다. 마거릿은 빈곤과 다산이 모자의 사망률을 높인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고, 그녀는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여성의 임신 조절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산아제한 운동을 시작한 마거릿

이를 위해 마거릿은 산아제한 운동을 시작했고, ‘반란여성 (The Woman Rebel)’이란 신문을 발행했다. 1914년 3월에 나온 창간호를 통해 마거릿은 이 신문의 목적이 여성들에게 삶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선언했다. 그리고 그녀는 여성들이 혼전에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 파괴의 권리, 창조의 권리, 사람답게 사는 권리, 사랑하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외쳤다.

당시 법적으로 낙태나 피임이 금지되어 있던 미국 사회에서 마거릿의 산아제한 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거릿은 멈추지 않고 ‘가정의 한계(Family Limitation)’라는 책자를 발행해 각종 피임 방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소개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콤스톡법 위반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에 임하게 된다.

피임 센터를 열어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킨 마거릿

마거릿 생어는 여성이 임신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그녀의 노력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지지자들이 생겨났고, 정부는 마거릿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다. 이후 마거릿은 1923년 최초의 피임 센터를 열었고 1942년에는 ‘미국가족계획연맹’을 조직해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힘썼다. 노년에도 마거릿 생어는 20세기 여성들이 산아를 조절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적인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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