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 디자인 최윤수 수습]

▶ 파올로 로시 (Paolo Rossi)
▶ 출생-사망 / 1956.9.23. ~ 2020.12.10.
▶ 국적 / 이탈리아
▶ 활동분야 / 축구 선수
▶ 주요경력 / 1986 제13회 멕시코 월드컵 국가대표, 1982 제12회 스페인 월드컵 국가대표

1970∼80년대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 파올로 로시는 마법사라고 불리던 천부적인 골잡이였고, 축구계의 큰 별이었다. 

윙어에서 중앙 공격수로...골잡이의 탄생
로시는 어린 시절 이탈리아 유벤투스 유스 팀과 함께 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당시 무릎이 좋지 않았던 로시는 팀을 떠나 1976년 세리에B 클럽 비첸자로 옮겨 선수 생활을 했다. 불운해 보이지만 이는 로시에게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비첸자에서 로시는 윙어에서 중앙 공역수로 포지션을 바꿨고, 이는 골잡이 ‘로시’ 탄생의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윙어에서 센터 포워드로 전향한 로시는 1970∼80년대 이탈리아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성장했다. 

‘최고’ ‘최다’ 수식의 골잡이
골잡이라는 수식은 로시에게 매우 적절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 명문 유벤투스와 AC밀란 등에서 뛴 로시는 유벤투스에서 세리에A 2회 우승을 비롯해 코파 이탈리아(이탈리아컵),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UEFA 슈퍼컵 등에서 한 차례씩 우승을 경험했다. 이탈리아 국가대표로도 1977년부터 1986년까지 활약하며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48경기에 출전해 20골을 터트렸다. 로시는 이탈리아가 4위를 차지한 1978년 아르헨티나 대회에서도 3골을 넣어 월드컵에서만 개인 통산 9골을 기록했다. 로시는 역대 이탈리아 국가대표 중에서 크리스티안 비에리, 로베르토 바조와 함께 월드컵 최다 득점 선수다. 

월드컵 스타, 발롱도르 등 수상
로시가 자신의 참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은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였다. 그는 당시 대회에서 6골을 터트려 득점왕에 오르며 이탈리아에 44년 만이자 통산 세 번째 우승을 안겼다.  최강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3-0 승리를 이끌었고, 폴란드와의 4강전에서도 두 골을 터트려 2-0 승리에 앞장섰다. 그러고는 서독과의 결승에서 선제골로 3-1 승리에 기여하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로시는 대회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골든볼도 차지했다. 월드컵 단일 대회에서 우승, 득점왕, 최우수선수상을 독차지한 선수는 1962년 칠레 대회 가린샤(브라질)와 1978년 아르헨티나 대회 마리오 켐페스(아르헨티나), 그리고 로시 세 명뿐이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로시는 그해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도 수상했다.

선수 자격정지 ‘시련’ 딛고 일어나
마법사, 골잡이라는 수식을 받으며 최고의 공격수로 명성을 쌓아가던 로시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로시의 축구 인생 중 가장 큰 오점으로 기억될 사건으로 1980년 이탈리아 프로축구를 강타한 승부 조작 스캔들 당시 뇌물을 받은 혐의로 3년간 선수 자격정지 징계를 받은 것이다. 애초 스페인 월드컵에도 출전할 수 없었지만 계속 무죄를 주장했던 그는 약 2년 만에 징계에서 풀려 가까스로 월드컵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당시 2년의 공백에도 로시가 대표팀에 발탁된 것을 두고 비난 여론도 있었으나 그는 '월드컵 우승 주역'으로 거듭나며 논란을 한방에 잠재웠다.

10일(한국시간) 이탈리아 축구 영웅 파올로 로시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축구 레전드 디에고 마라도나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지 2주 만이라 축구 팬들의 안타까움이 컸다. 로시의 사망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는데, 난치병을 앓아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주 특별한, 당신 같은 사람은 앞으로는 없을 것" 로시의 부인 페데리카 카펠레티는 자신의 SNS에 남편의 별세를 애도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이는 로시의 가족과 지인을 넘어 전 세계 축구팬이라면 공감할 말로, 세계 축구 역사에 있어 ‘파올로 로시’는 영원한 레전드, 그리고 큰 별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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