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문화, 경제, 의료 등 다양한 부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성과들이 이어지며 우리의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젊은 기업가들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새로운 땅에서 다양한 어려움과 갈등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달성하며 젊은 세대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에서 비행회사 ‘플라이 하이’를 운영하는 ‘미스터리’ 이광진(31세). 그 역시 우여곡절 속 성공스토리로 자랑스러운 젊은 한국 기업인으로 꼽히고 있다. 꿈도 많고 열정도 컸던 이광진 씨는 비행회사 CEO이외에 베이시스트, 재즈 콘트라베이스·트럼펫 연주가, 영어학원 강사, 파일럿, 자선사업가 등 다양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플라이 하이' 이광진 최고경영자(CEO) [이광진 제공]

비행의 꿈을 키워주는 플라이 하이

'플라이 하이'는 파일럿을 양성하는 기숙사형 비행회사이다. 파일럿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언어 과외를 병행해 적응을 돕고, 교습용 비행기도 1대 보유해 비행 경험도 쌓게 하는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항공사 파일럿이 되려면 미연방항공청(FAA)에서 발급하는 자가용 비행 면장(PPL), 계기 면장(IR), 상업비행 면장(CPL), 다발프로펠러 비행 면장(MEL) 등 4단계 자격을 모두 취득해야 한다. 이광진 씨는 “준비하는 학생들이 외국어 실력 때문에 필기나 실기보다 2시간 넘는 구술 면접을 어려워하는 것에 착안해 '플라이 하이'를 차리게 됐다”고 설명하다.

한 사고뭉치의 특별한 경험

지금은 어엿한 한 기업의 CEO이자 다양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광진 씨는 그만큼 많은 실패를 겪었고 좌절을 겪기도 했다. 대구 출생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사고뭉치였던 그는 부모가 정신 차리라고 보낸 서부 아프리카의 중서부 지역 라이베리아에서 중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수도 몬로비아에 있는 선교센터가 세운 학교에 다니며 한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또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알았고 인내도 배웠다고 전한다. 전기가 안 들어와 밤에는 촛불을 켜야 했고, 식수 부족에 풍토병·해충·더위와 싸워야 했기 때문. 특히 내전이 심해져 1년 만에 귀국해야 했다.

“포기해선 안 된다”

이광진 대표 경험을 담은 '플라이 하이' [이광진 제공]

귀국한 이 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베이스기타를 배워 대구예술대에 합격했다. 뒤늦게 배워 동기 중에 가장 실력이 뒤처져 고민하던 그는 휴학 후 콘트라베이스로 전공을 바꿔 네덜란드의 왕립음악학교인 '프린스 클라우스 콘서바토리움'에 지원해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이 합격에도 포기를 모르는 이 씨의 일화가 담겼다. 그는 실기면접이 끝난 뒤에야 입시정보를 알았지만 1년 뒤를 기다리지 않고 학장에게 기회를 달라고 이메일을 보냈다. 그의 열정을 인정한 학교는 규정에도 없는 영상 심사를 해주었고, 그 덕택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 씨는 "그때의 경험 덕에 뭐든 늦었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전한다.

꿈은 바뀌어도 열정은 바뀌지 않는다

어렵게 얻는 유학 기회지만 그는 중도에 방향을 바꿨다. 제대 후 대구예술대에 복학해 2학년을 마친 뒤 다시 계명대학교 경영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유학 당시 언어로 고생을 해봤기에 어떻게 하면 빨리 영어를 습득할 수 있는지 가르칠 자신이 있었던 그는 학원 강사와 과외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연주자로서의 꿈을 접고 영어학원 운영을 꿈꾸기 시작했고, 준비 하던 중 재미동포 2세인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25살에 결혼한 그는 부인이 첫째를 임신한 2015년 처가가 있는 미국 애리조나의 주도 피닉스로 건너갔다.

마이애미 푸른 하늘에 그린, 새로운 꿈

미국에서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애리조나의 맑은 하늘에 반한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파일럿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2015년 1월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비행학교를 다니면서 이광진 씨는 비싼 학비와 언어로 고생하는 학생들이 처한 어려움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영어 과외로 학비를 벌어 과정을 마친 그는 2018년 1월에 파일럿 자격을 취득했다. 내친김에 더 어렵다는 비행교관 자격에도 도전해 합격했다. 이후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취업한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회사를 차렸다. 그것이 현재의 ‘플라이 하이’이다. 특유의 열정과 그간 쌓아온 영어 과외 경험 그리고 사업수완을 지닌 이광진 씨는 5천 달러 들고 미국에 온지 5년 만에 번듯한 직업과 회사를 가졌고 집도 사고 둘째 아이도 출산하게 되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사회적 책임감

라이베리아 초등학교 후원하는 이광진 대표 [이광진 제공]

그는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으로의 발돋움도 꾀하고 있다. 비행교관이 된 이래로 3년째 라이베리아의 초등학교에 운영비 및 교육용 기자재를 보내는 등 후원을 이어가고 있는 것. 나아가 이 씨는 라이베리아에 제대로 된 학교를 세우는 일을 계획 중이다. 유학시절 라이베리아에서 만난 또래 아이들이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들의 자립을 돕겠다고 맹세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광진 씨는 향후에 파일럿 취득 전 과정을 교육하는 굴지의 비행학교를 세우려는 목표도 세워두고 있다. 이 씨는 자신이 특별 케이스라 여기지 않는다. “살면서 꿈이나 목표도 바뀔 수 있습니다. 뭐든 늦었을 때는 없는 거 같아요. 중요한 것은 생각에 머물지 않고 도전하는 겁니다.”라는 기치를 내건 채 이광진 씨는 오늘도 부지런히 꿈의 비행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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