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1945년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통해 김일성이 공식적으로 전면에 나섰고 당이 통일된 조직체계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더불어 기독교도가 많은 우파세력이 계속적으로 남한으로 내려와 저항세력이 미약했기에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조선독립동맹(속칭 연안파)’과 그 산하군대인 ‘조선의용군’이 무장해제를 당한 후 1946년에 뒤늦게 귀국해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고 중국공산당과 가까웠던 점 때문에 소련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또한 소련파였던 허가이, 박창옥, 남일 등은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왔지만 토착적 기반이 미약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익이었던 조만식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반동으로 규탄 받아 제거되었으며 농민중심의 천도교 청우당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렇게 좌익이 우세한 와중에도 함흥과 신의주 등지에서 반공학생의 궐기가 있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겨성되었다. 이는 5도행정 10국과 지방인민위원회를 통합한 중앙주권기관으로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이 선임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중앙행정기관과 조선통일정부가 조직될 때까지의 잠정적인 북한 내의 중앙주권기관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였으며 기본과업은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며 북한지역에 혁명적 민주기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민주개혁의 첫사업으로 토지개혁이 진행되었다. 법령 밝포 후 불과 20여일 만에 개혁이 완수되었는데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임시인민위원회의 지도 아래 빈농과 머슴들로 조직된 11,500여 개의 농촌위원회를 중심으로 집행되었으며, 토지개혁의 결과 지주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으나 소작빈농이 하층 중농의 수준으로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토지개혁에서 혜택을 입은 이들은 공산당에 대거 입당하여 4천 5백여 명의 당원으로 출발했던 당원이 토지개혁 직후에는27만 명으로 늘어났다.

북한의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세력을 기초로 하여 진보적인 우파와 일시적으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강력한 독재정권을 세우는 인민민주주의를 앞세워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빈농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일성이 있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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